(사진제공=Stock food/ Fotodom)
러시아 음식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기록물의 저자는 아랍의 역사, 천문, 지리학자인 이븐 루스타로 그는 동슬라브족이 마유, 그러니까 말젖만 먹고 산다고 적었다. 그런가 하면 치열한 냉전 시절 유럽에서 출판된 한 인기 요리책에는 러시아 수프 오크로시카(окрошка)는 맥주와 보드카를 섞어 만들고, 보르시(борщ) 수프는 반드시 상한 상태로 식탁에 오른다고 나와 있다. (두 수프를 처음 맛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철의 장막이 무너지자 러시아 음식에 대한 편견 하나가 더 생겨났는데 러시아인들은 철갑상어의 알, 캐비어(черная икра)를 식탁 위에 산처럼 쌓아놓고 먹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러시아에서 유럽이나 미국으로 건너간 요리사들은 전통적으로 조리한 러시아 음식이 아니라, 오마 샤리프가 주연한 할리우드 영화 '닥터 지바고'를 통해 머나먼 설국 러시아를 떠올리는 외국인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그런 음식을 선보였다.
이에 본래의 러시아 음식이란 어떤 것인지 Russia포커스가 요리 전문가의 조언을 구해 정리해 보았다.
러시아식 벽난로 페치 혹은 페치카 (사진제공=리아노보스티) |
러시아식 벽난로 페치(печь) 혹은 페치카(печка)는 현대 공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극히 비효율적인 난방기구다(열효율성 30% 이하). 페치의 내부는 성인 장정이 기어 들어가 원한다면 그 안에서 목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이렇게 커다란 난로의 내부 온도를 빵을 구울 수있을 정도로 높이려면 커다란 장작개비가 열 개는 넘게 필요하다. 크지 않은 나무 한 그루가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그렇지만 대신에 페치가 열이 한번 잘 오르면 오래 열을 가해야 하는 음식 여러 가지를 동시에 조리할 수 있다. 대가족이 배불리 먹을 만큼의 빵과 피로크(오븐에 구운 러시아식 파이)가 한 번에 들어간다. 이렇게 한번 불을 땐 후에는 식는 데 8~12시간이 걸리는 페치의 구조적 특징에서 러시아만의 음식 문화가 탄생했다.
열이 서서히 식어가는 페치의 특성을 잘 이용한 음식은 섭씨 200도에서 80도 사이의 온도에서 장시간 뭉근히 끓이기가 필요한 것들이다. 그런 음식들 중에서 오늘날까지도 러시아 가정에서 가장 자주 먹으며 널리 사랑받는 것이 바로 양배추 수프 '시(щи)'와 곡물로 만든 죽 '카샤(каша)'다.
자연적인 유산발효를 이용한 채소와 버섯 등의 전통적인 염장법은 러시아어로는 '크바셰니에(квашение, 러시아 전통발효음료 '크바스'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됐다)'라고 하는데 이는 러시아 음식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소금에 절인 오이와 양배추 피클의 간을 맞춘 간물 '라솔(рассол)'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간장이 쓰이는 용도와 비슷한 역할을 러시아에서 해왔다. (애주가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라솔은 아침 숙취 해소에 특효약이기도 하다.)
생양배추로 만드는 '시' 말고 '솔랸카(солянка)', '라솔니크(рассольник)' 같은 러시아인들이 즐겨 먹는 수프 요리들이 바로 이 라솔을 주재료로 하는 '라솔 요리(рассольные блюда)'에 속한다. 중세의 여행가였던 독일 학자 아담 올레아리우스는 모스크바 공국을 여행한 후 이곳 사람들이 먹는 '포흐멜카(похмелка)'란 음식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그가 묘사한 포흐멜카는 절인 오이 라솔에 잰 양고기 구이였다.
러시아 캐비어 (사진제공=이타르타스) |
러시아의 대표 음식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것이 러시아에는 언제나 차고 넘쳤던 수 많은 종류의 민물고기를 주재료로 한 요리들이다. 16~17세기 러시아인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기념비적 문학작품 '도모스트로이(Домострой, 가훈집)'에는 수십 가지가 넘는 생선 염장법이 언급돼 있다.
여기에 물론 그 유명한 러시아 캐비어도 있다. 최근 캐비어는 생산량이 급감했는데 불과 400여 년 전만 해도 러시아 일부 현에서는 기근이 든 해에 밀가루가 귀해지면 말린 캐비어를 밀가루에 섞어 밀가루 양을 늘리기도 했다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러시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생선 파이로 쿨레뱌크, 리브니크, 라스테가이가 있다.
피로크(пирог)와 그 밖의 밀가루 반죽 요리들도 러시아 음식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다. 피로크 속과 반죽의 종류도 무궁무진하지만 소가 드러나게 만든 것, 소 위에 반죽을 덮어 가장자리를 찝어가며 모양을 낸 것, 크고 넓적하게 빚어놓은 만두 같은 '즈기벤(сгибень)', 동그란 반죽 가운데 러시아식 크림치즈 트보로크를 고명으로 얹은 '바트루시카(ватрушка)' 등 파이 자체의 종류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맛도 슴슴한 것, 시큼한 것, 단 것, 라솔을 넣은 것 등 다양하다.
사순대재(Великий пост)를 앞두고 치러지는 러시아 고유의 사육제 마슬레니차(Масленица)의 대표음식은 러시아식 밀가루전 '블린(блин)'이다. 블린은 마슬레니차의 대표음식이지만 꼭 이 때만 먹는 것은 아니다. 성탄전이 끝나고 성탄주간(Святки)이 시작되면 귀리가루로 블린을 부친다.
러시아는 다민족 국가다. 수 세기를 거치면서 러시아 음식은 여러 다른 민족들의 전통음식과 어울리며 조화를 이뤄왔다. 지금은 거의 러시아 음식으로 간주되고 있는 작은 만두 '펠메니(пельмени, 핀위구르족의 전통음식)'와 국수 '랍샤(лапша, 터키에서 유래)' 같은 것들은 모두 이웃 국가에서 들어온 것이다.
그런가 하면 광대한 러시아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들도 역으로 러시아 음식의 영향을 받아 더욱 풍요로워졌다.
유감인 것은 요근래 러시아에서 고유의 조리법대로 만든 '토박이' 러시아 음식을 내놓는 식당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대개는 흉내낸 수준에 그친다. 맛은 있을지 몰라도 '진짜'와는 거리가 먼 음식들이다.
그러나 반가운 소식도 있다. 러시아 지방 이곳저곳에서 러시아의 전통적 페치를 설치한 레스토랑들이 생겨나고 있는가 하면 메뉴판의 음식수 보다 전통 조리법을 고집하는 신세대 요리사들이 나타나고 있다. 현대인의 요리재료 목록에서 거의 사라질 뻔한 순무를 재배하는 농가도 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