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두 독수리와 붉은 별 사이에서”... 20세기 전쟁의 가시밭길을 치열하게 걸어온 카자크인들

(사진제공=Getty Images/Foto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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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카자크인의 운명은 비극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희생자인 동시에 ‘팔라치(палач)’, 즉 사형집행자였다.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열된 카자크인은 수많은 공적을 올렸지만 동시에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Russia포커스가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와 해외의 카자크인의 역사를 추적했다.
역사 속의 카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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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러시아의 카자크촌에 경보가 울렸다. 동원령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작고 붉은 깃발을 손에 쥔 카자크 기병대가 카자크인 거주지역 전체를 휩쓸고 다녔다. 이들을 본 사람들은 밭일을 멈추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출정 준비를 했다. 러시아 전체의 운명을 바꿔놓은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지주들을 보호하고 싶지 않다'

20세기 초 카자크인 인구는 약 400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예로부터 가정에서도 군대식 전통을 지켜온 훌륭한 기수(騎手), 노련하고 용맹스러운 전사였다. 황실에 대한 충성심에 대한 대가로 카자크인들은 거의 모든 세금과 인두세의 면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평범한 카자크인 대부분은 궁핍한 삶을 살았다. 유일한 수입은 직접 경작하거나 세를 놓은 토지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 토지마저도 카자크 군대의 지휘관들은 불평등하게 배분하곤 했다.

카자크 기병대의 최고 '아타만(атаман)', 즉 최고사령관 자리는 러시아 황태자가 맡았다. 황실은 자신의 주요 지지기반 중 하나인 카자크 기병대를 1905년 혁명 당시 시위대 해산, 농민·노동자 탄압에 적극적으로 동원했다. 그러나 카자크 중 일부는 인민의 반대편에 서서 지주들을 보호하는 것을 거부했다. 몇몇 카자크촌에서는 가난에 절망한 카자크인들이 정부에 반대하는 대중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수포로 돌아간 공적

27인으로 구성된 독일군 기병중대를 단 세 명의 동료와 함께 섬멸시킨 카자크인 코지마 크류치코프(Козьма Крючков)에 관한 소식이 유럽 전역에 날아들었다. 크류치코프는 1차 세계대전의 전투에서 용맹을 발휘해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은 첫 인물이었다. 1차 대전을 통틀어 카자크인 12만여 명이 이 훈장을 받았다.

한편 가장들이 떠난 카자크 촌은 쇠락의 길을 걸었고 결국 황실은 카자크인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게 됐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시위대 해산에 투입된 몇몇 카자크 부대는 명령 수행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시위대 편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정부를 타도했을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많은 카자크 부대도 볼셰비키 편으로 합류해 있었다.

혁명은 카자크 사회를 분열시켰다. 소비에트 정부가 처음 내놓은 포고령들은 대다수 가난한 카자크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볼셰비키는 참전 중지를 선언하고, 카자크인들이 소비에트 정부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토지를 주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그들에게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저항의 진앙지는 바로 러시아 카자크촌의 심장부인 돈강 유역이었다.

1918년 오랜 카자크 가문 출신의 표트르 크라스노프 장군이 가장 흉포한 카자크 비정규군 '돈 카자크 기병대'을 이끌고 적군에 대항해 싸웠다. 크라스노프는 볼셰비키 포고령을 파기하고 자신들의 거주하는 땅은 독립국가, 자신은 독재군주라 선포했다. 적군 편에서 싸운 카자크인 2만 5천~4만 명이 총살형을 당했고, 3만 명이 추방당했다.

크라스노프 장군은 독일 황제에게 자신의 '국가'를 승인해 주면 협력하겠다는 제안을 담은 전보를 보냈다. 독일은 크라스노프에게 열차 차량 여러 대에 무기를 실어 보냈다. 그러나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후 크라스노프의 '왕국'은 붕괴됐고, 그는 도망자 신세가 됐다. 1920년 경 카자크의 저항은 막을 내렸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정부에 적대적인 계층인 카자크 소탕을 시작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카자크인들은 총살형에 쳐하거나 가족 전체를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등 이들의 공동체 의식을 와해시키려 했다. 1922년 카자크군이 소유하던 토지는 소련 공화국 영토로 몰수됐다. 그러나 이것이 카자크 사회의 최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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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의 적

1930년대말 소련은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카자크 기병대의 소련 붉은 군대 복무 금지 조치가 해제됐고 카자크 제복 착용이 허용됐다. 곤궁에 빠진 카자크들은 날붙이를 집어들고 피골이 상접한 콜호스(집단농장)의 말에 올라타 전장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때문에 그들의 용맹함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카자크 기병들은 말 안장에서 장갑을 두른 전차 위로 뛰어내려 관측창을 외투로 덮어버리고 화염병으로 전차에 불을 붙였다. 몇몇 기병사단은 2차대전을 앞두고 실제로 부대 내 카자크인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카자크 기병대'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그때까지도 '카자크'라는 말은 적군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자크인들이 소련 편에서만 싸운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선동 공작을 통해 내전에서 당한 패배를 설욕하라고 카자크인들을 부추기면서 카자크 독립 국가 '카자키야(Казакия)' 수립을 약속했다. 그러자 국외로 이주한 카자크인들과 독일군 점령지역의 카자크인들이 독일군에 가담했다. 크라스노프 장군도 이들에 합류했다. 카자크인들은 점령지역에서 보초임무를 맡았고, 소련 붉은 군대,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게릴라들을 상대로 싸웠다. 안타깝게도 전쟁이라는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카자크인들의 사기뿐 아니라 명예도 땅에 떨어졌다. 나치독일의 폰 판비츠 장군 지휘 하에 카자크인들은 동유럽 주민들을 대상으로한 전쟁 범죄와 대량학살, 파괴에 참가했다.

1945년 5월 독일은 항복했다. 한 카자크 군단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가서 영국군에 항복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처칠과 스탈린, 루즈벨트 연합국 정상 3인은 적의 편에서 싸우다가 연합군에 포로로 잡힌 소련 시민은 소련군에 인도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크라스노프 장군의 지휘 하에 알프스 산맥을 넘은 카자크군은 무기를 버리고 오스트리아 리엔츠 소재 전쟁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 포로 '인도'는 5월 28일에 시작됐다. 카자크 포로들이 단체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영국군이 들이닥쳐 이들을 마구 구타하면서 트럭에 쓸어담았다. 이들을 소련군이 점령한 구역으로 실어나를 차량들이었다. 이런 일이 2주 동안 계속됐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4만~6만 명이 소련군에 인도됐으나 그중에는 '1차 이민 파동'(10월 혁명 전후)때 이주했다가 포로 인도 시점에 우연히 리엔츠 인근에 있다가 붙잡힌 이들과 비(非)카자크인, 소련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저항하다가 사망한 이가 천 명이 넘었다.

크라스노프, 시쿠로(Шкуро), 폰 판비츠 등 독일편에서 싸운 카자크군 지휘관들이 1947년 모스크바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여성들을 포함해 소련에 인도된 포로들은 소련의 수용소에 수용되어 가혹한 교정노동형에 처해졌다. 1955년에 생존자들이 사면됐다. 석방된 카자크인들은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숨긴 채 소련에서 일을 하며 살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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