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날리 국립공원, 알래스카 (사진제공=알라미/레기언 메디아)
미국 백악관 사이트에 올라온 알래스카의 러시아 귀속 청원서에 서명한 사람 수가 벌써 3만 5천 명을 넘었다.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훔쳐갔다거나 임대했다 돌려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까지도 많이 있다. 이처럼 널리 퍼진 속설들에도 불구하고 알래스카 거래는 정당했다. 양측은 이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19세기에 러시아 알래스카는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당시 알래스카 수도 노보아르한겔스크(현 시트카)에서는 중국산 옷감과 차, 심지어 냉장고가 발명되기 이전까지 미국 남부에서 필요로 했던 얼음까지도 거래되었다. 이곳에서는 선박을 건조하고 공장을 건설했으며 석탄을 채굴했다. 수많은 금 매장지가 있다는 사실도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런 땅을 매각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 없어 보였다.
러시아 상인들은 원주민들과의 물물교환으로 구할 수 있는 바다코끼리 상아(코끼리 상아만큼 비쌌다)와 값비싼 해달 모피를 찾아 알래스카로 몰려들었다. 이 사업은 제정 러시아의 무역회사 러시아-아메리카 회사(RAC, Russian-American Company)가 전담했다. RAC을 세운 것은 18세기 러시아 사업가들, 용감한 여행가들, 장사치들 같은 모험가들이었다. 알래스카의 모든 광산과 광물은 RAC 소유였다. RAC는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 계약을 독자 체결할 수 있었고 자체 깃발과 자체 화폐(가죽으로 된 '마르크화')도 갖고 있었다.
RAC에게 이러한 특권을 부여한 것은 제정 러시아 정부였다. 제정 러시아 정부는 RAC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였을 뿐 아니라, RAC에 지분도 보유하고 있었다. RAC 주주 중에는 황제와 그 가족들이 포함돼 있었다.
알렉산드르 바라노프 (사진제공=Getty Images/Fotobank) |
미국내 러시아인 정착촌의 '최고 통치자'는 유능한 상인 알렉산드르 바라노프(Александр Баранов)였다. 바라노프는 학교와 공장을 세웠고, 원주민들에게는 순무와 감자 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또 요새와 조선소를 세웠는가 하면 해달잡이 사업을 확장하기도 했다. 바라노프는 자칭 '러시아의 피사로(잉카 제국을 정복한 스페인 장관, 편집자 주)'였으며 단순히 지갑에 돈을 채우기 위해서만 아니라 알류트족 족장의 딸을 아내로 맞았을 정도로 마음속으로도 알래스카에 깊은 애착을 느꼈다.
RAC는 바라노프가 경영하던 시절에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1,000%가 넘는 이익을 남겼다! 하지만 연로한 바라노프가 현업에서 물러나자 레온티 가게메이스테르(Леонтий Гагемейстер) 해군 대위가 그 자리를 대신하며서 군계통에서 새 직원과 주주들을 함께 데려왔다. 이제는 회사 정관에 따라 해군 장교들만이 회사 경영진이 될 수 있었다. 군 출신들이 이 알짜배기 사업을 빠르게 장악했지만, 회사는 바로 이들의 행위로 인해 파산을 맞고 말았다.
회사의 새 주인들은 천문학적 액수의 봉급을 자신들에게 배정했다. 일반 장교들은 1,500루블(당시 자관이나 원로원 의원들의 연봉과 맞먹는 액수였다), 회사 대표는 15만 루블을 연봉으로 배정받았다. 반면 현지인들에게서 모피를 매입하는 가격은 반값으로 후려쳤다. 그 결과 이후 20년간 에스키모와 알류트족이 해달을 멸종시키다시피 해 알래스카에서 수익성이 가장 높은 돈벌이가 자취를 감춰 버렸다. 궁핍에 시달리게 된 현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러시아인들은 군함에서 해안 마을을 향해 포탄을 쏘면서 폭동을 진압했다. .
장교들은 다른 소득원을 찾아내려고 했다. 얼음과 차 무역이 이때 시작됐는데, 이 애물단지 사업가들은 그조차도 제대로 경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임금을 줄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연 20만 루블의 국가보조금이 RAC에 제공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회사를 구해주지는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로 그때 크림전쟁이 시작됐다. 영국과 프랑스, 터키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러시아는 알래스카에 물자를 공급해 줄 수도 알래스카를 방어해줄 수도 없음이 분명해졌다. 연합국 함선이 해로를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금 채굴 전망조차도 불투명해졌다. 적국인 영국이 알래스카를 봉쇄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왔는데, 그렇게 되면 러시아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됐지만,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는 어느 때보다도 훈훈했다. 알래스카 매각 구상은 양측에서 거의 동시에 나왔다. 에두아르트 스테클(Эдуард Стекль) 워싱턴 주재 러시아 공사가 황제의 지시에 따라 윌리엄 수어드(William Seward) 미국 국무장관과 협상을 시작했다.
러시아와 미국 관리들이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양국내에서는 이 거래에 반대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전신도 개통하고 금광도 개발하는 등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 개발한 이 땅을 어떻게 팔아 넘긴단 말인가?" 당시 러시아 신문들은 이렇게 쓰고 있었다.
1867년 3월 30일 워싱턴에서는 러시아가 아메리카에서 소유하고 있던 150만 헥타르의 땅을 순전히 상징적인 금액인 720만 달러에 매각하는 계약이 체결되었다. (사진제공=Getty Images/Fotobank) |
"이 '얼음이 가득한 궤짝'과 아침식사로 대구 간유를 마시는 5만 명의 에스키모 야만인이 왜 미국에 필요한가?"라며 미국 언론도 분개했다. 미국 언론만 그런 게 아니었다. 미국 상하원 의회도 알래스카 매입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67년 3월 30일 워싱턴에서는 러시아가 아메리카에서 소유하고 있던 150만 헥타르의 땅을 순전히 상징적인 금액인 720만 달러에 매각하는 계약이 체결되었다. 심지어 시베리아의 쓸모 없는 땅조차도 그렇게 헐값으로 팔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황은 심각했다. 미국이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알래스카의 공식 이양식은 노보아르한겔스크에서 진행됐다. 미국과 러시아 군대가 국기 게양대 근처에 도열한 가운데 예포에 맞춰 러시아 국기를 게양대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러시아 국기가 게양대 꼭대기에서 엉켜버렸다. 러시아 국기를 내리려고 게양대에 기어 올라간 수병이 깃발을 아래로 던졌는데, 이때 깃발이 우연하게도 러시아군 총검에 걸리고 말았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 후 미국은 시트카로 개명한 도시의 건물들을 몰수하기 시작했다. 미국 시민권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러시아인 수백 명은 상선을 타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이듬해가 돼서야 비로소 집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불과 얼마 되지나지 않아 이 '얼음 궤짝'에서 황금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미국에 수백만 달러를 안겨준 클론다이크 골드러시가 시작됐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러시아가 문제투성이의 무익한 알래스카 지역에서 제때 벗어나지 못했다면 세계 최대 열강들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됐을지 누가 알랴. 이 지역에서는 오로지 유능하고 대담무쌍한 상인들만이 수익을 끌어낼 수 있었을 뿐 해군 관료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