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이타르타스)
빅토르는 1962년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혼혈(полукровка)로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고 아버지는 러시아 이주 한인 후예였다. 어린 시절 빅토르는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는 취미로 일본 목각인형 네츠케를 조각하기도 했고 용돈을 벌 셈으로 로버트 플랜트같은 서방 록스타들의 초상화를 펜으로 그려 암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유명인들의 사진은 음악잡지와 음반만큼이나 궁했다. 하지만 빅토르와 그의 친구들은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며 록 음악에서 뉴웨이브 음악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섭렵했다. 빅토르는 기타 연주를 독학으로 배우며 아주 이른 나이에 작곡을 시작했다. 그런 다음에는 4인조 록 밴드 '키노'를 결성했다. 이들의 사운드는 '조이 디비전(Joy Division, 영국 펑크 록 밴드)'과 '더 큐어(The Cure, 영국 록 밴드)', 특히 빅토르가 좋아한 '더 스미스(The Smiths, 영국 록음악 밴드)'를 연상케 했다.
'키노'는 언더그라운드 콘서트에서부터 시작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소련 유일의 음반사 '멜로디야(Мелодия)'에 진출할 기회가 이들에게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빅토르와 그의 친구들은 언더그라운드 록커들이 모두 그렇듯이 카세트 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해 유포했다. 오리지날 녹음 테이프(마스터 테이프에서 복제한 것으로 정식 규격을 갖춘 테이프)는 질 좋은 보드카 세 병 값에 달하는 10루블에 팔렸다. 이후 오리지널 테이프를 재녹음한 이른바 '복제판'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는 '사미즈다트(Самиздат, 자가출판, 지하출판)'에 비견되는 음악의 '사미즈다트'인 셈이었다.
소련의 공식 음반 제작판매 구조를 거치지 않은 이들의 흥미로운 음악은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소련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키노의 가장 강렬한 앨범 가운데 하나인 '혈액형'(1988)이 바로 그런 운명을 맞이했다. 전국의 거의 모든 녹음기에서 이 앨범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멋진 전자음, 거의 춤곡에 가까운 리듬을 갖춘 키노의 히트곡들과 같은 것은 소련에서 더는 나오지 않았다. 이보다 1년 전에는 권위 있는 세르게이 솔로비예프 감독의 영화 '아싸(Асса)'가 개봉됐는데,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는 뜻밖에도 키노의 라이브 공연이 펼쳐진다. 여기서 키노는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의 비공식 국가로 자리매김한 '우리는 변화를 기다린다(Мы ждем перемен)'라는 후렴구가 들어간 노래를 불렀다. 흥미로운 점은 이 노래가 정치와는 무관했으며 그보다는 어른들의 삶을 갈망하는 청소년들의 심정을 전달했다는 사실이다. 빅토르 최는 사회적 틀을 포함해 그 어떤 틀에도 얽매여 있지 않았다.
‘우리는 변화를 기다린다(Мы ждем перемен)’ (동영상제공=YouTube)
러시아 록음악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현상이었지만, 사실 빅토르는 타고난 천성 그대로였다. "우리 모두의 내면 속에 짐승이 잠자고 있다. 우리 모두의 내면 속에 늑대가 잠자고 있다. 나는 춤을 출 때 늑대의 숨소리를 듣는다. 우리 모두의 내면 속에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나 나는 왜 우리가 서 있고, 우리 주변 자리들은 텅 비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여섯 번째 앨범 '밤(Ночь)'에서 빅토르는 이같이 노래했다. 그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에나 있는 것을 노래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도 있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이보다 더 나중에 나온 노래 가사를 인용하자면, "여기에 있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는 노래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소련과 러시아를 말하는 것일까? 옛 것과 새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세계에 대한 전면 부정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이 모든 것에 대해서 한꺼번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빅토르 최의 보편적 발언들은 1980년대 당시에도 진리였고 지금도 진리로 남아 있다.
다른 러시아 언더그라운드 록음악 가수들과는 달리 빅토르 최는 자신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듯이 말했다. 벌거벗은 땅의 벌거벗은 인간으로 문화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는 듯이 말했다. 오직 땅과 하늘, 별, 태양, 죽음, 사랑, 여름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말들이 그의 노래들의 키워드였다. 결국, 맥락은 죽어 자리를 내주고 과거 속으로 사라졌지만, 빅토르 최가 노래한 말들은 지금도 죽지 않고 살아 남아 있다.
1988~89년 당시 빅토르 최는 이른바 '만인의 모든 것'이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친구들을 만날 때면 "어떤 음악 듣고 있어?"라고 묻곤 했는데, 이에 대한 대답은 흔히 "우리 것" 아니면 "외국 것"이었다. 이렇게 먼저 확인하고 나면 그 뒤로 더 구체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디페쉬 모드(Depeche Mode, 영국 3인조 밴드) 아니면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 영국 헤비메탈 밴드)? 러시아 바르드(Бард, 음유시인) 아니면 소련 팝음악? 이처럼 극과 극을 달리는 취향들을 유일하게 한데 아우른 사람이 바로 빅토르 최였다. 그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다. 한편, 그의 노래들은 심지어 음악에 소질이 없는 사람조차도 기타로 연주하며 따라 부르기 쉬워 그의 생전에 이미 민중 속으로 파고 들었다.
영화 '아싸'의 마지막 장면은 거장 감독 솔로비예프 자신이 아니라 그의 문하생인 카자흐스탄 출신의 라시드 누그마노프(Рашид Нугманов)가 찍었다. 곧이어 누그마노프는 자신만의 색다른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 '이글라(Игла, 바늘)'를 찍기 시작했는데, 그 즉시 아마추어나 다름 없는 빅토르 최에게 주연 자리를 제안하고 어떤 경우에도 아무것도 '연기'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친구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빅토르는 생전에 록음악 스타가 아니었다.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말수가 적었고 농담도 좀처럼 하지 않았으며 악명 높은 로커들의 생활방식보다는 운동을 더 좋아했다. 예를 들면 가라데를 좋아했다. 영화 속에서도 빅토르는 평소처럼 냉소적이고 말수 없는 아웃사이더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영화 속 이미지는 대중들의 의식 속에서 현실 속 빅토르 최 자신과 동일시되었다. 더욱이 그는 공연 복장과 헤어스타일 그대로 영화를 찍었다.
1988~89년 키노는 외국, 그중에서 특히 덴마크에서 공연 초대를 받았다. 덴마크에서 키노는 자선 페스티벌 'Next Stop'에 참가했다. 또 프랑스 최대의 록 페스티벌 '부르제'와 이탈리아에서도 공연했다. 그의 서방 음반 활동은 프랑스에서 시작됐다. 키노가 자신들의 노래 일부를 녹음해 '마지막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음반을 출시한 곳이 바로 프랑스였던 것이다.
미국에서 빅토르 최는 그의 출연 영화 '이글라'가 '파크 시티(Park City)' 영화제 '특별 이벤트' 비경쟁 부문에 출품되어 상연된 이후에 딱 한 번 공연을 선보였다. 빅토르와 기타리스트 유리 카스파랸이 시사회장에 참석하여 영화 상연 이후 몇 곡의 노래를 연주한 것이다. 빅토르의 미국 방문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빅토르는 "그곳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거리를 조용히 산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작은 독립 음반사인 '골드 캐슬 레코드(Gold Castle Record)'에서 음반을 발매했고 뉴욕의 주간지 '빌리지 보이스(Village Voice)'는 그의 공연을 긍정적으로 평하기도 했다.
빅토르 최가 국제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빅토르 자신은 서방 활동에 회의적이었다. 한 인터뷰에 따르면, 빅토르는 동서양 관객이 러시아 록음악에 진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는 덴마크 순회 공연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자선행사였기 때문이다." "다른 조건이었다면 어쩌면 거절했을지 모른다." 프랑스 공연과 관련하여 빅토르는 1989년 봄 '젊은 레닌주의자(Молодой ленинист)'라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확실한 입장을 표명했다. "지금 서방에서는 러시아와 소비에트적 상징물, 기타 다른 많은 것이 대유행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대하는 태도는 마트료시카 인형을 대하는 것만큼이나 진지해 보이지 않는다. '보라, 러시아 사람들도 우리와 거의 똑같이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많은 음악 그룹이 해외에서는 재정 조건은 물론이고 공연 여건도 최악일 줄 알면서도 그런 기회를 잡아 앞 다투어 해외로 나갔다. 나는 마트료시카 인형이 전혀 되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국가 위신이다. 해외로 나가고 싶다면 관광객으로 가는 게 더 낫다.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다른 방식을 시도했다. 첫째, 먼저 프랑스에서 음반을 출시했다. 둘째, 프랑스의 록 페스티벌은 유럽에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나는 얼마나 소통할 수 있을지 가서 보기로 했다. 프랑스행은 대성공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러시아의 뭔가 이국적인 것을 기대했을 테지만, 우리는 록음악 자체만을 봤다."
빅토르 최는 1990년 스물 여덟 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키노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던 콘서트는 유럽 최대의 축구 경기장 가운데 하나인 모스크바 루지니키 스타디움 중앙무대에서 열렸다. 완전 매진을 기록했다. 빅토르는 다음과 같이 확신 있게 말한 바 있다. "아파트, 언더그라운드 클럽, 아니면 만 명이 운집한 콘서트홀이든 공연장소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공연할 기회가 있으면 공연한다. 기회가 없다고 해도 무보수로 공연할 용의가 있다. 지금 내게는 더 넓은 무대에서 공연할 기회가 있다. 그래서 이걸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런 건만은 아니다. 어쨌든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다. 물론, 국내 정세 등 상황이 허락하는 한해서다."
빅토르 최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언 25년이 다 되었다. 그동안 새로운 음악과 스타가 많이 쏟아져 나왔지만, 키노의 음악은 여러 세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여전히 듣고 있다. 키노는 세월을 거스른다. 러시아에 좋은 음악가는 많지만, 록 영웅은 단 한 사람뿐이다. 그의 이름이 바로 빅토르 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