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이타르타스)
1차 대전 참전 당시 제정러시아는 항공기 열강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항공기 제작 분야에서 뒤떨어진 탓에 제공권을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항공기 부문은 해외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일리야 무로메츠'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순수한 러시아 개발 항공기조차 수입 부품을 사용해 조립된 것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군 항공단을 재정비하기로 결정했다. 1917년까지 군 항공기 보유 규모를 300대로 늘린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 일을 황제의 직계 친척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에게 일임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고 1914년 12월에는 이미 중량형 전투기 '일리야 무로메츠'로 구성된 항공전단이 구성되어 있었다. 항공전단은 군 최고사령부 직속으로 '일리야 무로메츠' 10대로 구성된 본대와 훈련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러시아가 참전할 당시 러시아군이 갖고 있던 항공기는 대부분이 정찰용으로 사용하는 프랑스제 경량급 비행기인 '뉴포르-4'와 '파르망'이었다. 이들이 낼 수 있는 최대 속력은 시속 115km, 최대 허용 중량은 30kg를 넘지 못했다. 이 상당히 낙후한 비행기들 말고 좀 더 현대적인 비행기들도 있었다. 최대 시속 125km에 최대 비행고도가 4km인 '모랑파라솔', '데페르뒤생', 중량급 항공기 '일리야 무로메츠', 그리고 D. 그리고로비치가 설계한 물 위에서 이착륙이 가능한 세계 최초의 수상 비행기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제정러시아의 낙후한 공업상황 때문에 전쟁 중반에 이미 영국, 프랑스, 독일에 항공기 수와 그 성능에 있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러시아의 항공기 공장들이 생산해내는 비행기 총 수는 가장 상황이 좋던 1916년에도 월 30~40대를 넘지 못했고, 게다가 여전히 항공기 엔진을 자체 기술로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러시아인이 설계한 '일리야 무로메츠' 같은 구산 항공기조차 외국산 엔진이나 외국산 부품을 라이센스 조립한 엔진을 장착했다.
문제는 기술적 낙후성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장군들은 항공기를 전투에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몰랐고 조종사들도 경험이 부족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듭하다가 참전 석 달만에 러시아 항공단 거의 대부분이 희생되는 결과를 낳았다.
독일 항공기들이 압도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하자 (1916년 초 무렵 러시아가 보유한 항공기 수는 360대, 독일은 1,600대였다) 러시아 국방특별회의는 국내 항공기제작 공장에 전투기 생산을 발주했다. 그 결과 1916년 말까지 1,384대의 비행기와 1,398대의 항공기엔진이 제작되었다.
그 덕분에 독일 항공기들의 공세를 어느 정도 늦출 수는 있었으나,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독일은 여전히 양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유럽의 하늘을 장악하고 있었다. 러시아 항공단의 손실은 계속 늘어났다. 육군 비행대와 특수군단 비행대 항공기가 199대, 요새 비행대 항공기는 64대를 남기고 모두 격추됐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국방특별회의 참석자들이 아연실색하는 일도 벌어졌다.
1917년부터 1918년 상반기까지 교전 중, 혹은 사고로 유실된 항공기의 자리를 채우려면 전선에 항공기 1만 65대가 더 투입되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군사기술총국은 국내 항공산업이 그만한 규모의 항공기를 공급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항공 산업은 대부분 민영이었다. 세계대전이라는 환경하에서 러시아 항공산업이 대규모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가 그것이다. 그러나 정치 윗선에서 항공단의 상황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나오자 국방부는 대규모 국영 항공기제조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그에 따라 헤르손에 항공기 엔진과 비행기를 제작하는 공장을 건설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헤르손 공장을 국가 발주의 신형 항공기 개발 중심지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1917년 2월부터 시작된 국가권력 시스템의 와해는 얼마 안 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이어지고, 그 이후 러시아의 항공기산업은 오랫동안 표류 상태에 놓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