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록의 대부” 보리스 그레벤시코프와 아쿠아리움

록그룹 아쿠아리움의 영원한 리더인 보리스 그레벤시코프 (사진제공=알렉세이 쿠덴코/리아 노보스티)

록그룹 아쿠아리움의 영원한 리더인 보리스 그레벤시코프 (사진제공=알렉세이 쿠덴코/리아 노보스티)

보리스 그레벤시코프(Борис Гребенщиков). 그는 러시아의 록의 대부이다. 록그룹 아쿠아리움(Аквариум)의 영원한 리더인 그는 1970년대 후기 비틀스 풍의 실험음악에서 시작해 1980년대 소림사 합창단과 함께 노래를 하고 1990년대 인도 전통음악 라가에 심취했다가도 언제나 어쿠스틱 기타 연주로 돌아왔다. RBTH가 러시아 록의 최대 문제아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를 소개한다.

"나는 세관 바닥에 떨어지면서 태어났어. 내 아버지는 무역상이었고, 다른 아버지는 인터폴이었지." 그레벤시코프는 노랫말에서 자신의 출신배경을 신화화하는 걸 즐긴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레벤시코프는 1953년 레닌그라드(지금의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엔지니어 발명가였고 어머니는 여성복 아틀리에 디자이너였다.

1950년대 소련에서는 창턱에 녹음기를 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온 동네와 공유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레벤시코프는 어릴 적 이런 '의식'을 굉장히 좋아했고 바로 이때부터 그의 음악 사랑이 시작됐다. 그레벤시코프는 학교에서 이른 나이부터 시와 산문도 썼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관심 분야는 하나로 좁혀졌다.

그레벤시코프의 첫 기타는 아버지와 쓰레기장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주워온 기타를 수리하고 기탓줄을 산 후 어린 그레벤시코프는 첫 코드를 잡기 시작했다. 그는 음악학교에 가지 않고 스스로 연주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저 음유시인 비소츠키와 갈리치의 음악을 들으면서 멜로디를 고르고 이내 자신의 곡을 쓰기 시작했다. 마치 밥 딜런처럼 말이다.

록그룹 '아쿠아리움'의 탄생

그레벤시코프는 12살에 처음으로 비틀스의 'Help'를 접했다. "사진기를 처음 만지다가 촛점이 딱 맞았을 때의 느낌 같았죠." 그는 당시 충격을 이렇게 회상한다. "그전까지는 그냥 어린애에 불과했어요. 학교와 집을 왔다갔다하는... 그런데 갑자기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고 왜 하고 싶은지가 분명해진 거죠."

학교에서 그레벤시코프와 뜻이 맞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는 이 친구들과 함께 남들 몰래 미국의 라디오리버티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녹음하고 연주하곤 했다. 이 동네 패거리들이 자라 록그룹 아쿠아리움이 되었다.

'로큰롤은 죽었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동영상제공=YouTube)

그레벤시코프는 학교를 마치고 대학교 응용수학학과에 진학했다. 그렇다고 음악을 그만둘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대학교에서 오로지 음악만 했고 음악을 하면서 큰 만족을 느꼈습니다. 가끔 악몽을 꾸면 꿈에서 적분이 날아다니곤 했죠."

1972년에 록그룹 아쿠아리움이 결성됐다. 그레벤시코프는 여전히 학업보다 음악에 골몰했지만, 대학 졸업 후에 연구소로 들어갔다. 아쿠아리움의 초창기 녹음곡들이 언더그라운드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방가르드적인 음향(부스럭 소리, 기침 소리, 자작 음향효과)와 난해하고 부조리한 가사는 바로 페테르부르크 지식층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림사 승려들의 합창과 페레스트로이카 주제곡

1981년 아쿠아리움은 '청색 앨범(Синий альбом)'을 냈다. 음은 전보다 분명해졌고 가사도 깊이가 있어졌다. 밥 딜런과 밥 말리의 음악적 영향이 느껴지는 음반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레벤시코프를 '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쿠아리움은 '청색 앨범' 발표 후에 전설적인 앨범을 몇 개 더 낸다. 그중 '라디오 아프리카(Радио Африка)'라는 앨범의 수록곡 장르 폭이 가장 넓다. 록과 재즈, 레게뿐 아니라 소림사 승려들의 합창도 들어 있다. 실제로 단파방송을 듣는 듯이 각 곡 사이에 지지직하는 라디오 주파수의 파열음이 들린다. 이 앨범의 히트곡 '로큰롤은 죽었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Рок-н-ролл мертв, а я еще нет)'는 러시아 록의 주제가가 됐다. 미국에서 닐 영의 'My my, hey hey'처럼 말이다. 아쿠아리움의 공연장을 찾는 관중들이 점차 늘어나 발 디딜 틈 없어졌다.

소련 붕괴와 함께 1980년대가 막을 내렸다. 그레벤시코프는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해 '불 속의 기차(Поезд в огне)'라는 곡을 썼다. 밥 딜런의 유명곡 'Wheel's on Fire'의 영향을 받은 곡이다. "벌써 70년째 우리는 전쟁을 하고 있다. 인생은 싸움이라고 우리는 배웠다. 그런데 새로 입수된 정보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까지 싸운 것은 우리 자신이었다고 한다." '불 속의 기차'는 발표되자마자 페레스트로이카의 주제곡이 됐다. 아쿠아리움은 러시아 전역에서 유명해졌다. 공연장에서는 마치 그레벤시코프가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격렬하게 맞이했다.

해외 진출, 그리고 자아를 찾아 떠난 여행

그레벤시코프는 1988년 듀오 유리스믹스(Eurythmics)의 멤버이자 프로듀서인 데이브 스튜어트의 초청으로 미국에 앨범을 녹음하러 갔다. 그 결과 발매된 영어앨범 'Radio Silence'는 전혀 아쿠아리움답지 않았다. 단순한 가사에 경쾌한 비트, 깨끗한 음정이 이어지는, 전형적인 1908년대 후반 서구 록이었다. 그래도 그레벤시코프는 미국에 진출한 덕에 서구의 당대 전설적인 록 음악가들인 믹 재거, 밥 딜런, 이기 팝, 데이빗 보위, 조지 해리슨과 만나 교류할 수 있었다.

특히 조지 해리슨은 그레벤시코프에 특별한 영향을 줬다. 그레벤시코프에게 믹 재거나 밥 딜런, 데이빗 보위가 음악적 우상이었다면, 해리슨은 정신적인 롤모델이기도 했다. 그레벤시코프는 과거 해리슨이 그랬듯 1990년대 힌두교와 불교 사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노랫말의 영감을 받고 음악의 명상적 모티프를 떠올렸다.

'불 속의 기차' (동영상제공=YouTube)

그레벤시코프는 1990년대 부터 2000년대에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그 경험이 아쿠아리움의 노랫말과 음악에 여실히 드러난다. 모든 가능한 음악 양식과 서로 배치되는 문화가 난무한 가운데 모두를 위로하는 오묘한 찬가들이 탄생했다. 싱어송라이터의 노래가 민요를 만나고 펑크록 사이사이에 만트라 소리가 끼어들었다. 불교 신자들이 열을 맞춰 걷고, 공산주의자들이 기도를 하며 이콘화에는 힌두교의 신 가네샤의 모습이 그려 있다. 그레벤시코프의 세계에는 신성모독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000살 된 꿀벌들

2년 전 아쿠아리움은 결성 40주년을 맞았다. 그런데 아쿠아리움은 4,000주년으로 자축했다. 그레벤시코프의 기준에서 록 그룹의 연차는 말 그대로, 아니면 적어도 영적으로 이 세계의 화합을 얼마나 지켜왔는가이다. 작년 그레벤시코프 자신은 환갑을 맞기도 했다.

그레벤시코프는 여전히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 새 앨범을 내고 세계 순회공연을 한다. 얼마 전 발표한 곡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사람들은 그가 일을 관두기를, 그가 돈에 자신을 팔고 술독에 빠지고 빈털터리가 되기를 바랬지. 불에 타죽거나 얼음물에 빠져죽기를 바랬어. 하지만 잘못된 벌들은 여전히 잘못된 꿀을 만들어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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