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전 발레는 어쩌다 쿠데타의 상징이 됐나... 발레의 고전 ‘백조의 호수’ 초연 120주년

(사진제공=발렌틴 바라노브스키/마린스키 극장)

(사진제공=발렌틴 바라노브스키/마린스키 극장)

차이콥스키의 발레가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의 상연 목록에 오르게 된 계기, 20세기의 변화하는 삶에 맞춰 발레의 줄거리가 어떻게 각색되어 왔는지 Russia포커스가 알아보았다.

1895년 1월 전설적인 발레 '백조의 호수'가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맞춰 처음 상연됐다. 마리우스 페티파와 레프 이바노프가 공동연출한 마린스키 공연이 이 발레의 초연은 아니었지만, 마린스키 공연이야말로 차이콥스키의 작품에 대한 전 세계의 태도를 바꿔놓았다.

그후 120년간 '백조의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자주 무대에 오르는 발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연출을 통해 결말은 행복하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했으며 주인공들의 이미지도 다채로웠다. 예를 들면, 영국 출신 매튜 본(Matthew Bourne)이 연출한 발레에서는 남성 무용수들이 백조를 연기했다. 하지만 마린스키 극장의 연출이야말로 오늘날까지도 '백조의 호수'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벤젤 라이징거 (Wenzel Reisinger, 1828~1892)의 안무로 연출된 최초의 '백조의 호수'는 1877년 3월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무대에 올랐지만, 관객 동원에 성공하지 못하자 상연 목록에서 제외됐다.

"라이징거의 연출에서는 판토마임식 에피소드가 많았다. 오데트는 자신의 운명과 사악한 마녀인 계모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이 공연을 본 사람들은 무용이 빈약하다고 말했고 비평가들은 음악 요소가 안무 요소를 확실히 지배했다고 썼다." 마린스키 극장 출판부 편집자 올가 마카로바의 말이다.

1890년 초 마린스키 극장 발레마스터 마리우스 페티파는 차이콥스키와는 대본을, 작곡가 리카르도 드리고와는 악보를 공동으로 다시 썼고 레프 이바노프와는 발레를 공동으로 연출했다. 이들이 합작해 만든 '백조의 호수' 발레는 1895년 1월 15일 초연됐다.

"이 발레의 기적은 차이콥스키의 그 자체로 완벽한 음악과 페티파-이바노프가 매우 극적으로 구성한 안무가 어우러져 만들어졌다"고 마카로바는 지적했다.

하지만 '백조의 호수' 발레는 현대적인 해석을 거치면서 최초 연출작과 상당히 달라졌다. 19세기 말 고전 무용에서 남성 무용수들은 어려운 도약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무대를 아름답게 거닐면서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필요할 경우 발레리나를 보조했다. 그때는 발레리나들의 모습도 달랐다. 의상은 더 폐쇄적이었으며 무대에서 다리를 너무 높이 들어올릴 수도 없었다. 그런 동작은 교양 없는 행동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모든 발레는 '백조의 호수'로 불려야 한다"

발레의 줄거리도 자주 바뀌었다. 1950년에는 안무가 콘스탄틴 세르게예프가 발레를 새롭게 연출했는데, 이때 행복한 결말이 처음 등장했다. 이전에는 마지막 장면에서 호수의 거친 물결이 오데트와 지그프리트를 집어삼켰으나 세르게예프의 새로운 연출에서는 지그프리트가 마법사와의 결투에서 그의 날개를 꺾고 승리하면서 악의 권세가 종말을 고한다.

세르계예프는 페티파와 이바노프의 안무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지만, 동시에 무용에서는 현대 발레가 성취한 업적을 반영했다. 이 연출작은 지금까지도 마린스키 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다. 현재 이 발레가 마린스키 극장에서 상연된 횟수는 벌써 1,757회에 달한다.

저명한 안무가 조지 발란신은 '백조의 호수'를 가리켜 러시아 발레의 품질 보증서라고 말하면서 "모든 발레는 '백조의 호수'로 불려야 한다. 이것이 활발한 티켓 판매와 관객 동원 성공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오데트-오딜리아 역은 여러 시기를 거치는 동안 안나 파블로바, 갈리나 울라노바, 나탈리야 두딘스카야, 마리나 세묘노바, 울리야나 로팟키나, 디아나 비시뇨바 등의 뛰어난 발레리나들이 연기했다.

외국 공연 기획자들은 마린스키 발레단 순회 공연을 초청할 때 다름 아닌 '백조의 호수' 공연을 해달라고 가장 많이 요청하고 있다.

1991년 쿠데타의 상징

구소련 지역 주민들에게 '백조의 호수'는 1991년 발생한 쿠데타의 상징이었다. 그 해 8월 19일 라디오에서는 고전음악만 흘러나왔고, TV에서는 '백조의 호수'(볼쇼이 극장 공연 녹화)만 계속 방영됐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국가 최고 지도자들이 사망했을 때만 있었는데, 그 날은 국가 전복사태가 있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소련 대통령직을 박탈하고 '주권국가연합조약'을 파기하려 한 모든 시도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묻혀 소련 시민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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