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알 수 없는 부유한 신사가 유람선 ‘아틀란티스’호를 타고 이탈리아로 여행하다 카프리 섬에 도착하여 갑자기 사망한다. 그의 시신은 심지어 시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의 가족도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부담이 된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신사의 시신은 일등실 객실이 아니라, 거대한 동력장치들이 불길하게 작동하고 있는 동력실 밑바닥에 놓여 실려 간다.
부닌의 동시대인이었던 비평가 아브람 데르만은 이 우화적 단편소설에 관해 “체호프의 창작이 막을 내린 뒤로 10여 년이 지났지만, 레프 톨스토이의 서거 이후 발표된 것을 제외하면 이 기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의 강도와 의미에 필적할 만한 러시아어 예술 작품은 없었다”고 썼다.
미탸가 사랑하는 여학생 카탸는 배우 공부를 하며 더 성숙해지면서 그의 소년적 유치함을 조소한다. 미탸는 정열과 질투심에 괴로워하다 자기 자신을 더 잘 알아보기 위해 모스크바를 떠나 시골로 간다. 여기서 미탸는 오두막집에서 시골 아낙네와 육체적 사랑에 빠지지만, 이로부터 더 괴로워한다. 카탸는 미탸를 버리고 극장 지배인에게로 간다고 편지를 써 보낸다. 그러자 미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철학자이자 부닌의 친구였던 표도르 스테푼은 “‘미탸의 사랑’에서 부닌은 자신의 감정에 혼란스러워한 학생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인간 사랑의 비극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고 썼다.
볼셰비즘과 소비에트 권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백군에 동감을 표시했던 부닌은 1920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러시아 역사에서 혼란스럽고 복잡했던 이 시기를 반영한 그의 일기 ‘저주받은 날들’은 파리의 러시아 망명 신문에 부분적으로 발표됐다. 소련에서 이 작품은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기 전까지 출판되지 못했다. 이 작품에는 볼셰비키에 대한 증오심과 혁명에 대한 환멸감이 스며 있었기 때문이다. 부닌은 ‘저주받은 날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혁명은 민중이 용케도 잠시 권좌에 올라 축제를 벌이며 기뻐 날뛰다가도 늘 그렇듯이 결국 전보다 더 나쁜 상황에 빠지는 것으로 끝날 뿐인 유혈 낭자한 자리바꿈 게임이라는 걸 정말로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부닌의 견해에 따르면, 1930년 파리에서 출판된 바로 이 소설이 “러시아 고전 산문의 전통을 발전시키고 있는 엄격한 쏨씨”를 인정받아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다.
이 소설에는 알렉세이 아르세니예프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 그리고 그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했던 여인 리카의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리카가 아르세니예프에게서 달아나자 그는 리카를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있는 곳을 숨긴다. 마침내 아르세니예프는 그녀가 몇 달 전에 사망했고 그에게 자신의 사망 소식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닌에게도 그의 주인공처럼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함께 살았던 연인 바르바라가 있었다. 이 소설에는 부닌의 삶에 관련된 장소와 인물 등 다른 자전적인 모티프가 많이 담겨 있다.
작가 콘스탄틴 파우스톱스키는 ‘아르세니예프의 생애’을 가리켜 세계 문학의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단편집 ‘어두운 가로수길’에 실린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젊고 부유한 두 주인공의 수수께끼 같은 사랑과 밤의 밀회를 그린 ‘정결한 월요일(Чистый понедельник)’이다. 사순절 첫째 날인 ‘청결한 월요일’에 여주인공은 어디론가 떠난다고 말하면서 주인공에게 자신을 그만 놓아 달라고 말한다. 2년 후 주인공은 모스크바 수도원의 수녀들 사이에서 그녀를 발견한다.
부닌 자신도 ‘어두운 가로수길’을 자신의 최고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이 작품 속의 이야기들은 무수하게 연극 무대에 올랐고 영화로 각색됐으며 러시아 중고교 필독 프로그램에도 포함돼 있다. ‘어두운 가로수길’의 첫 번째 이야기는 1938년 뉴욕에서 발표됐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쓰여진 나머지 이야기들은 모두 파리에서 발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