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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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여지주의 아들인 투르게네프는 모스크바대학교 학생 시절 주변의 다른 젊은이들처럼 옷을 차려입고 말끔하게 수염을 깎고 다녔다. 대학 졸업 후에는 외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문학적 영예도 안으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840년대에 투르게네프는 턱수염과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장신에 기골이 장대했던 투르게네프는 자신이 작품들에서 묘사한 ‘러시아 귀족나리(русский барин)’를 더 많이 닮게 되었다.
게다가 턱수염 덕분에 투르게네프는 자신이 빈약한 턱을 감출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유명한 장발에도 서리가 내려앉아 고상함을 더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 유럽인(русский европеец - 서구화된, 혹은 유럽물 먹은 러시아인)’ 이미지가 최종적으로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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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포병장교 복무 당시 당연히 군의 조발규정을 따랐다. 단정하게 깎은 머리와 말끔하게 면도한 얼굴은 요즘 군대에서도 선호되지만, 제정러시아에서는 장교의 용모에 대한 규제가 더 많았다.
그러나 레프 톨스토이는 전역과 동시에 턱수염을 기르기 시작했고, 그의 턱수염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턱수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당시에는 그렇게 긴 턱수염을 기르는 것이 정부의 전제에 대항하는 반항의 표시이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복장도 바꿨다. ‘소박한 농민복’을 걸친 톨스토이 백작은 당시 세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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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육군공병학교를 졸업한 도스토옙스키도 물론 젊은 시절 군인 모발규정에 따라 수염이 없었다. 몇 년 후 그는 페트라솁스키 서클(철학자 미하일 페트라솁스키의 집에서 매주 모였던 혁명적 견해를 가진 자유 사상가 단체) 가담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선고에 따라 그는 시베리아에서 처음에는 병사로, 나중에는 부사관으로 복무해야 했다. 따라서 유형 기간 내내 상고머리를 하고 있어야 했다.
특사를 받고 시베리아에서 유럽 쪽 러시아로 돌아온 이후 도스토옙스키는 우리가 익히 아는 외모로 변모했다. 동시대인들의 회상에 따르면, 포마드를 잔뜩 발라 세심하게 빗어넘긴 그의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하면서 몹시 가늘었고 벌써 이마 부분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대머리가 시작되는 뭇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도스토옙스키도 이런 탈모 현상을 턱수염으로 상쇄하기로 했다.
자신의 외모에 관심이 많던 도스토옙스키는 숱이 적어 보잘것없는 자신의 턱수염 때문에 크게 낙심했다. 어린 조카딸들조차 그의 턱수염을 갖고 놀려댔다. 턱수염을 기른 도스토옙스키는 ‘귀족나리’와도 ‘농부’와도 닮지 않았다. 턱수염은 그의 작품 전반에 서려있는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복음서의 고행자 같은 특징을 그에게 부여해 주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한때 눈동자의 색깔도 달랐다. 간질 발작 당시 한쪽 눈을 다쳐 아트로핀으로 치료했는데, 이로 인해 다친 눈의 동공은 눈을 가득 채우며 검은색으로 변했고 다른 한쪽 눈의 동공은 갈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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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출신으로 신사연했던 부닌은 1917년 혁명 발발 전에 은세기의 문학 동아리들에 들어가 푸시킨 상도 두 개 받았고 명예 학술원회원 칭호도 받을 수 있었다. 여인들도 부닌을 사랑했고 부닌도 여인들을 사랑했다. 당시 사진 속에서 부닌의 모습은 맵시있는 콧수염에 황제수염(뾰족한 턱수염), 우아한 정장을 차려입은 댄디처럼 보인다.
1920년대는 러시아뿐 아니라 1차 세계대전을 겪은 다른 나라들에도 중대한 전환기였다. 코르셋을 입은 나른한 표정의 여인들과 황제수염을 기른 우아한 신사들의 시대였던 ‘아름다운 시대(Belle Époque, 19세기 말 20세기 초 파리의 평화로운 시대)’가 막을 내리고 ‘광란의 1920년대(Roaring Twenties, 재즈의 시대)’가 시작됐다. 남자들은 무뚝뚝해졌고 말끔하게 면도하기 시작했다. 해외로 망명한 부닌은 당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따랐는데, 이는 그의 외모에 분명히 유리하게 작용했다. 구식 수염에서 벗어나자 그의 깎아놓은 듯한 얼굴선이 드러났다. 우리 앞에 드러난 강한 남성적 얼굴은 부닌의 산문과 완벽하게 일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