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슬라브학을 가르쳤던 러시아 작가이자 미국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하는 이 단어를 번역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포실로스티는 무엇인가? 나보코프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아무 잡지나 펼쳐 보면 반드시 이런 류의 사진을 보게 될 것이다. 한 가족이 막 라디오(자동차, 냉장고, 은식기 등 무엇이든)를 샀다. 엄마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만세를 부르고, 아이들은 입을 벌린 채 주변을 서성이고, 아기와 개는 라디오를 모셔 둔 식탁 모서리로 몸을 뻗고...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자랑스러운 선물기증자인 아버지가 의기양양하게 서 있다. 이런 광고의 짙은 ‘포실로스티’는 이런 저런 유용한 물건의 가치를 거짓으로 과장하는 데서가 아니라, 최고의 행복을 살 수 있으며 그런 구매가 구매자를 고상하게 만든다는 가정에서 오는 것이다.” 이게 한국 단어로는 무엇인가?
“이 단어는 진부함, 상스러움, 성적 방탕과 영적 빈곤을 아우른다”고 스베틀라나 보임 하버드대 교수는 덧붙였다.
독일어판 위키피디아에는 나드리브에 관한 개별 항목이 있는데, 러시아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핵심적 개념이라고 돼 있다. 이 단어는 사람이 깊이 숨겨둔 내밀한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 낼 때 통제할 수 없이 감정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 도스토옙스키의 나드리브는 주인공이 자기 반성에 너무 열중해서 자기 마음 속에 전혀 없거나 거의 없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드리브는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왜곡된 거짓 감정과 함께 표현되기도 한다. 장편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는 ‘나드리비(Надривы, 나드리브의 복수형)’라는 제목의 장도 있다.
소련 작가 세르게이 도블라토프는 ‘이 번역될 수 없는 함스트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함스트보는 무례함, 건방진 태도와 뻔뻔함을 합친 데다 벌 받지 않음을 곱한 것과 같다.’ 도블라토프에 따르면 바로 이 처벌을 받지 않는 특성 때문에 함스트보는 당신을 일격에 죽일 수 있으며, 맞서 싸울 수 없고, 그 앞에서는 물러서는 것 말곤 할 게 없다. ‘10년 동안 나는... 광란적이고, 기묘하고, 공포스러운 뉴욕에서 살고 있고, 여전히 함스트보의 부재에 놀란다. 여기서는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도 함스트보는 없다. 강도를 당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면전에 대고 문을 쾅 닫지는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일부 언어학자들은 이 단어는 도스토옙스키가 중편소설 ‘분신’에서 비유적 의미로 처음 쓰면서 도입됐다고 생각한다. 스투셰바차는 눈에 덜 띄게 되다, 배경으로 물러서다, 눈에 띄는 역할을 잃다, 몰래 떠나다, 난처한 상황이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 겁을 먹다 등의 뜻이다.
이 러시아어 단어는 ‘감정적 아픔’이나 ‘우울감’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이런 개념들은 단어의 깊이를 모두 반영하지 못한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이렇게 썼다. ‘어떤 영어 단어도 ‘토스카’의 모든 뉘앙스를 전달하지 못한다. 이는 별다른 이유 없는 커다란 정신적 고통의 느낌이다. 조금 덜 고통스러운 수준의 감정으로는 알 수 없는 마음의 고통... 혼란스런 불안, 향수병, 사랑의 괴로움이 있다.’
이 단어의 어원은 ‘있다’라는 뜻의 러시아어 동사 ‘비티(быть)’이다. 이 철학적 개념은 러영 사전에서 being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비티예는 단순히 삶이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관계없는 객관적인 사실(우주, 자연, 물질)의 존재를 의미한다.
뉴욕 대학의 교수이자 슬라브학자 엘리엇 보런스틴은 ‘베스프레델’을 말 그대로 ‘제한과 한계가 없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통번역사들은 이 단어를 ‘lawlessness’(무법)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훨씬 광범위하다. 이는 법 규칙은 물론 도덕 규칙, 사회에서 용인된 규칙을 위반하는 사람의 행위에 대한 평가와도 연결돼 있다.
다른 민족 출신 사람들에게 아보시가 무엇인지 설명하기란 꽤 어렵다. 한편 ‘아보시’는 아마도 러시아인의 중요한 민족적 특징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아보시를 바라다(надеяться на авось)’는 별다른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행운, 우연에 기대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루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속세의 행복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이들을 유로디비라 했다. 이들은 광인의 모습을 하고 방랑자의 삶을 살았는데, 목적은 모든 죄의 뿌리인 교만을 이겨내 내적 겸손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들은 존경을 받았으며 신과 가깝다고 여겨졌고, 사람들은 유로디비의 의견과 예언을 귀담아 듣고 두려워했다. 유로디비는 광기의 가면을 쓰고 대담무쌍하게 공동체의 권력자들을 비난했다. 예를 들어 니콜라 살로스라는 유로디비는 프스코프로 향하던 이반 뇌제와 군대를 보고 황제의 잔인성을 꾸짖었고, 이로써 프스코프 사람들의 처벌을 막고 도시를 몰락에서 구했다고 한다.
이 단어는 한국어로 ‘공적’이나 ‘위업’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지만, 다른 의미가 있다. 포드비그는 단순한 결과나 목적의 달성이 아니라, 용감하고 영웅적인 행동,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한 행동이다. 러시아 문헌에서는 군인 및 민간인의 포드비그, 심지어 학자의 포드비그에 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이 단어는 사심 없는 행동과 동의어로 쓰이는데, 예를 들어 ‘사랑의 이름으로 행한 포드비그(подвиг во имя любв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