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퍄티에서의 생활
출처: pripyat-city.ru출처: pripyat-city.ru
키예프에서 90km 떨어진 프리퍄티는 갓 태어난 신생 도시였다. 프리퍄티는 시내에서 불과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노동자들을 위하여 1970년에 건설됐다. 과거 소련에는 20개의 원전노동자 도시가 존재했으며 프리퍄티는 그 중 하나다.
출처: 블라디미르 리토프첸코와 막심 보로파이/ pripyat-city.ru
프리퍄티는 인구 7만 5천 명을 기준으로 건설된 도시다. 사고 전인 1985년 마지막 인구조사에서 도시 인구는 4만 8천 명으로 집계됐다.
프리퍄티 고등학생들. 출처: pripyat-city.ru
프리퍄티는 주민 연령 면에서도 젊은 도시였다. 도시민의 평균 연령은 불과 26세였다. 사람들은 시내에서 결혼식이 자주 치러졌다고 회상한다. 이때문에 결혼예복점이 지어지고 있었는데 사고와 그에 따른 주민 소개로 짓다가 방치됐다.
중학교에서 체조 수업출처: pripyat-city.ru
통계에 따르면, 사고 이전에 프리퍄티의 인구는 매년 약 1만 5천 명씩 증가했으며, 그 중 800명 정도가 프리퍄티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나머지는 구소련의 다른 도시에서 이주해온 이들이었다.
수학수업. 출처: pripyat-city.ru
시내에는 다섯 개의 시콜라가 있었으며, 학생 수는 6천 명이 넘었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건설. 출처: pripyat-city.ru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와 원전노동자 도시인 프리퍄티는 1970년 같은 해에 건설이 시작됐다.
노동자들의 댄스 밤. 출처: pripyat-city.ru
구소련 시절에는 주요 건설사업의 경우 ‘전소연방 돌격 건설’ 사업으로 공표되었고 프리퍄티 도시 건설도 그 중 하나였다. 전국 방방곳곳에서 젊은이들이 국가 기간시설의 건설에 동참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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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퍄티 시는 동명(同名)의 강(프리퍄티 강·드네프르 강의 지류) 연안에 세워졌다.
소풍. 출처: pripyat-city.ru
도시민 대부분이 체르노빌 원전에서 일했다는 사실만 뺀다면 프리퍄티 시민의 삶은 당시 여타 다른 소련 도시의 삶과 별 다를 바 없었다.
"폴레시예" 레스토랑. 출처: pripyat-city.ru
평온했던 프리퍄티 시민들의 삶은 4월 27일 낮 소개령 소식이 전해지면서 중단됐다. 오후 2시 시내 아파트로 버스들이 속속 도착해 경찰의 호위 하에 시민 전원을 도시 밖으로 소개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려진 것은 임시 소개령이었지만, 결국 아무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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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퍄티는 작은 도시였지만, 소련 기준으로 볼 때 부족한 것이 없는 풍족한 도시였다.
매점. 출처: pripyat-city.ru
식료품도 항상 넉넉히 공급됐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노동자들을. 출처: 세르게이 야쿠닌/ pripyat-city.ru
체르노빌 사고는 1986년 4월 26일 새벽 원자로 4호기에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시작됐다. 폭발로 2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방사능 피폭으로 수십 명의 원전 직원들이 사망했다.
소개 날. 출처: pripyat-city.ru
프리퍄티와 인근 거주지역에서 주민들이 소개된 후 원전 주변 30km 반경은 출입 금지 구역으로 설정됐다.
사고 이후 첫 사진. 출처: pripyat-city.ru
폭발로 무너져내린 원자로 4호기는 특수 시멘트 석관으로 덮어 폐쇄했다. 나머지 3개 원자로도 가동을 중단하고 방사능 물질 제거 작업이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