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 지지했나?

서울. 일본 군인들은 한국 수도 거리에서 걸어가는 모습.

서울. 일본 군인들은 한국 수도 거리에서 걸어가는 모습.

AFP
1910년 8월 주권국가로서의 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사실상 1905년부터 일본의 통치하에 있던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2일 일본제국의 공식적인 식민지로 병합되었다. 이러한 사태 발전에 대한 당시 제정러시아 정부와 언론의 반응은 어땠을까?

흔히들 1904-5년 2년에 걸친 러일전쟁의 기억이 생생한 러시아였으니 당연히 러시아는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넓은 맥락에서 볼 때 실제로 그러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실제 상황은 훨씬 더 복잡했다.

우선, 러일전쟁 말 무렵부터 러시아제국 외무성 안은 일본과의 화평을 지지하는 이들이 득세했다. 이들은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 외무대신과 그의 후임인 세르게이 사조노프 포함) ‘떠오르는 태양의 제국’ 일본의 동북아 패권이 탐탁치는 않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면서 일본과의 군사적 경쟁이 러시아 경제에 엄청난 부담이 됨을 들어 이를 중단하고자 했다. 그들은 복수를 꿈꾸기는커녕 오히려 일본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러시아의 장기적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어쩌면 그들이 옳았을 수도 있다.

이러한 분위기였기에 많은 러시아 외교관들은 러시아가 한국의 항일운동을 후원하거나 적극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가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불필요한 마찰을 불러올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게다가 제국주의가 절대 악(惡)이라는 인식이 당시 그들에게는 없었다.

복수의 기회

그렇다고 러시아 정부 내에 그런 의견이 압도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1905년 러일전쟁 패배의 치욕적 기억이 아직 생생했던 군부에서는 훨씬 대담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예로 1910년 블라디미르 수호믈리노프 당시 군부대신은 총리대신에게 보내는 비밀서한에서 러시아가 은밀히 한국의 항일운동을 지원하고 무장 독립투쟁을 비밀리에 후원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군부 밖에서는 호응을 얻지 못했고 불필요하고 헛된 모험의 시도로서 완전히 배척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당국은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 외무대신과 그의 동료들이 원한 것만큼 중립적이지는 않았다. 예로 연해주 당국은 1910년 이후 러시아 국경을 자주 넘나들던 한국 항일운동가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려고 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지역 당국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군사훈련이나 다른 활동들을 눈감아주었다. 당시 연해주에서는 한국인들의 비폭력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지역 당국은 이 또한 묵과했다.

러시아에서의 한국 독립운동

이범진 주 러시아 대한제국 초대 공사는 일본의 강제 병합 이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것이 허용됐으며 러시아 정부에서 월 100루블의 연금을 받았다. 이 금액은 당시 견실한 중류가정의 소득(잘 나가는 학교 교사나 시골 의사의 월급)에 맞먹는 것으로 진지한 정치 활동을 펼치기에는 부족했지만 이 역사적 상징성을 가진 인물이 넉넉한 생활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1911년 1월 이범진 전 공사가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에 대한 항의 표시로 자결하자 러시아 정부는 그의 장례비를 지급하고 유가족에게 재정지원을 해주기로 결정했다(그의 후손들은 아직 러시아에 살고 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자결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당시 러시아 언론은 그의 자결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그를 ‘쓰러진 영웅’으로 간주하는 분위기였다.

같은 시기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촌은 민족주의 운동과 항일 운동의 온상이었다. 조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피신해온 전 지휘관들이 다가올 항쟁운동을 꿈꾸며 열심히 무장병력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는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고서야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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