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2월 4일, 우즈베키스탄에서 사는 한인가족.
그리고리 분/ 타스구소련에는 자신들을 한인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약 50만 명 거주하고 있다. 구소련 한인 90%에 해당하는 이들 대다수는 중앙아시아 신생 독립국들, 특히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집중해 산다. 구소련 한인 중 7%를 차지하는 또 다른 거대 한인 공동체는 러시아 최동쪽 사할린 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그룹의 역사는 극적으로 다르다.
중앙아시아 한인들(이들 중 많은 사람이 러시아로 이주했다)은 1860년대에 풍부한 옥토를 찾아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한인 농부들의 후손들이다. 1900년대 초에는 이들의 뒤를 이어 항일 운동가들이 피난처를 찾아 러시아로 이주했다.
1937년 전까지 이들 한인 정착민은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지역들에서 살았는데, 일부 구역에서는 한인들이 전체 주민의 약 95%를 차지했다. 이들은 자체 학교 시스템과 신문, 출판사, 상점을 갖고 있었다.
1937년에는 극동 지역에 거주하던 소련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이곳이 한인 공동체의 지리적 중심지가 됐다. 1937년 강제이주는 한인들의 현지 동화를 촉진했다. 현재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한인 대다수는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한다.
사할린 한인들은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 소련의 일부로 남게 됐다. 그들은 러시아로 이주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살고 있던 땅 주인이 갑자기 바뀌었다.
1904-45년에 사할린 남부는 일본 제국의 일부였다. 1930년대 말부터 한인들은 광업과 어업, 목재 산업의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는 노동력 동원 운동의 일부로 더 많은 한인이 (종종 강제로) 이곳에 보내졌다. 그 결과 1945년에는 약 25만 명의 한인이 사할린 섬에 거주했다.
1989년 9월 1일, 키르키즈스탄에 있는 "모란봉" 카페에서 일하는 한인 김 마리나. 출처: 미하일 실라프시테인/ 타스사할린 주인이 바뀌면서 러시아가 사할린 남부 통제권을 다시 손에 쥐자 현지 일본인들이 즉시 추방되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인들은 그들의 뜻과 달리 떠날 수 없었다.
사할린 한인들은 많은 면에서 중앙아시아 한인들과 다르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이주 한인 2세대와 3세대인데, 중앙아시아의 전형적인 한인은 이주 7세대나 8세대이다. 또 사할린 한인은 자신들의 문화를 더 특이하게 유지했다. 심지어 동족 결혼조차도 1980년대 중반에 와서야 흔해졌다.
과거에 중앙아시아 한인들과 사할린 한인들의 관계는 종종 긴장된 관계였다. 조금 놀랍게도 그러한 긴장 관계에서 정치가 중요한 역할을 정치가 했다.
중앙아시아 한인들은 1930년대에 온갖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데도 이들의 세계관은 상당히 친공산주의적이고 대체로 친소비에트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할린 한인들은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 소련 정권에서 소외되어 있었고 소련 정권을 의심의 눈길로 바라봤다. 물론, 이것만이 유일한 긴장 이유는 아니었다. 문화와 가치, 전통의 차이(사할린이 대체로 더 보수적이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확실히 이러한 차이점들은 과거의 일이다. 새로운 세대는 더 이상 개의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