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 혁명적 사랑 – 레닌, 크룹스카야, 아르만트의 삼각관계

이네사 아르만트

이네사 아르만트

미하일 필리모노프/ 리아노보스티
역사의 기록에는 1917년 10월 혁명의 주역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랑했던 두 여인이 있다. 부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러시아 사회주의자 이네사 아르만트다. 혁명가의 아내와 애인이라면 적이 될 법한데도 이들 세 사람의 관계는 친밀했고 사실상 가족처럼 지냈다.

소련을 건설한 블라디미르 레닌이라는 인물에게 감상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기는 어렵다. 살아생전 그는 정치적 견해가 맞지 않으면 측근들과 격렬하게 의견 다툼을 벌였고, 권좌에 오른 뒤에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총살형을 문서에 서명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거의 없던 이 열정적 정치가가 1920년 10월 12일에는 평소와 다른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바로 레닌의 동지이자 친구이며, 많은 이들이 그가 사랑했다고 추정되는 연인 이네사 아르만트의 장례식 날이었다.

여성 혁명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그 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가 아르만트의 관을 따라 걸을 때 본 레닌은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눈을 감은 채 걷는데 위태위태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때는 아르만트가 날치크(모스크바 남쪽 1400km )에서 콜레라로 갑자기 사망한 지 몇 주가 지난 때였고 레닌은 이 죽음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는 그때를 이렇게 기록했다. “아르만트의 죽음이 레닌을 무너뜨릴까 봐 겁이 난다. 그는 울면서 한 곳만 응시했다.”

한 사회주의자 여인의 초상

1895년, 이네사 아르만트. 출처: 타스1895년, 이네사 아르만트. 출처: 타스

프랑스 여성 이네사 아르만트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 열다섯 살에 모스크바로 이주해와 할머니와 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다. 35세가 될 때까지 두 번 결혼했는데, 두 번째 남편이었던 블라디미르 아르만트가 그에게 혁명 사상을 '불어넣었다'. 1904년 이네사 아르만트는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한다. 1905년 혁명에 가담한 대가로 그는 러시아 북부지방에 유배형을 받았는데 1908년 유배지에서 스위스로 도주한다.

그의 두 번째 남편이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이네사 아르만트는 다섯 아이와 홀로 세상에 남겨졌지만, 혁명 과업을 완수하기 위한 활동을 이어간다. 그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과의 교류를 담당하고 혁명 문건을 번역하는 일을 하면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당시 함께 일했던 볼셰비키들은 이네사 아르만트를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물질적 조건에는 관심이 없었고 동지들에겐 세심했으며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까지도 내주려고 했다. 이네사는 그런 품성을 가진 여인이었다.” 여성 혁명가 류드밀라 스탈이 추억하는 이네사 아르만트의 모습이다. 삶에 대한 사랑, 가는 곳마다 늘 함께했던 쾌활함, 아름답고 매혹적인 모습을 많은 이들이 기록으로 남겼다.

우상과의 조우

1909년, 이네사 아르만트. 출처: 타스1909년, 이네사 아르만트. 출처: 타스

1909년은 숙명적인 만남이 일어난 해이다. 두 번째 남편과의 사별 1년 뒤 아르만트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변모시킨 책의 저자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을 만난다. 몇 년간 그들은 파리에서 활동했는데 그 사이 두 사회주의자들의 관계가 우정을 넘어섰다고 추정하는 동시대인들이 많았다. “레닌은 아담한 체구의 프랑스 여인에게서 가느다랗게 뜬 눈을 떼지 못했다”라고 프랑스 사회주의자 샤를 라포포르트는 썼다. 아르만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레닌은 그를 ‘친애하는 벗’이라고 부르면서 극진한 관심과 다정함을 표현한다.

“여기 파리에서의 거의 모든 생활이 수 천 가닥의 실로 당신을 그리워하는 생각과 연결돼 있어.” 첫 만남 이후 몇 년이 흐른 1913년 아르만트가 레닌에게 쓴 편지다. 이 여성 혁명가가 자신의 동지이자 스승인 레닌에게 진정으로 빠져있는 게 글에서 절절히 드러난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걸 듣는 것도 좋지만, 그냥 당신을 보고 있는 것만도 좋아. 첫째, 당신 얼굴에 생기가 돌기 때문이고, 둘째, 내가 당신을 보는 걸 당신이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껏 볼 수 있기 때문이야.”

크룹스카야의 역할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출처: 리아노보스티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출처: 리아노보스티

이네사 아르만트와 처음 만났을 때는 프랑스에 살고 있던 레닌과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부부의 결혼 생활도 11년을 맞는 해였다. 크룹스카야는 레닌의 열렬한 혁명 동지이자 조력자면서 동시에 충실한 아내이기도 했다. 볼셰비키 지도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을 벌일 법했던 두 여인은 그러나 두터운 우정을 나눴다. 크룹스카야는 “이네사가 왔다 가면 분위기가 편해지고 유쾌해졌다”라고 쓴 적이 있다. 아르만트도 크룹스카야를 사랑스럽게 표현한 적이 있다. “거의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크룹스카야가 좋았다. 그가 동지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뭔가 특별하고 근사한 부드러움과 다정함이 느껴진다.”

얼마 전 출간된 레닌 전기를 쓴 레프 다닐킨은 “레닌과 아르만트의 연애를 입증할 만한 기록은 (동시대인들의 회고록을 빼면) 없다“고 말하면서도 “레닌, 아르만트, 크룹스카야 세 사람의 관계가 체르니솁스키의 장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묘사된 새로운 사회주의 도덕인 ‘사실상 모든 것은 허용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상호 존중에 기초해야 한다’는 기준에 맞게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크룹스카야도, 아르만트도 질투를 한쪽으로 밀어놓고 서로를 존경하는 동지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다닐킨은 생각한다.

슬픈 결말

 1918년, 블라디미르 레닌. 출처: Global Look Press 1918년, 블라디미르 레닌. 출처: Global Look Press

레닌과 아르만트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레닌이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아내에게 충실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1913년 이네사는 “헤어졌어, 소중한 나의 사람, 당신과 나는 헤어졌어!”라는 괴로움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그는 레닌의 결심을 받아들였다.

'이네사 동지'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레닌과 혁명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이네사 아르만트는 유럽에서 편히 살 수 있는 프랑스 국적 여성이었지만 1917년 레닌, 크룹스카야와 함께 러시아로 돌아와 10월 혁명에 가담했다. 레프 다닐킨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난방조차 안 되는 끔찍한 환경에서 살면서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 건설을 위해 몸 바쳐 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르만트는 요양차 떠난 남부지방에서 콜레라에 걸려 죽음을 맞았다. 향년 46세였다.

블라디미르 레닌과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출처: Global Look Press블라디미르 레닌과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출처: Global Look Press

>> 10월 혁명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러시아 영화 6선

This website uses cookies. Click here to find out more.

Accept cook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