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대의 전차전’ 쿠르스크 전투 70주년... 참전 용사들의 회고

(사진제공=리아노보스티)

(사진제공=리아노보스티)

쿠르스크 전투의 최대 격전지인 프로호롭카. 1943년 7월 12일, 그때까지 수세에 몰려있던 소련군은 프로호롭카 전투로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전세를 역전시키며 히틀러 제3제국의 궤멸을 앞당기게 된다. 70년 전 7월 12일 작열하는 여름 태양 아래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프로호롭카 벌판에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차들의 백병전’이 벌어졌다.

프로호롭카 벌판은 침묵에 싸여 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기부금을 모아 세운 표트르-파벨 성당에서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이따금 들려올 뿐이다. 70년 전 이곳은 끔찍한 전투가 휩쓸고 지나갔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차전이 이곳 프로호롭카에서 벌어졌다. 불에 탈 수 있는 모든 것이 불길에 휩싸였고, 땅은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완전히 타버렸다. 이곳에서 소련 근위전차군과 독일군 최정예부대인 SS 기갑사단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쿠르스크 전투는 ‘쿠르스크 돌출부 대전투’라 부르기도 한다. 소련군이 구축한 방어선이 서쪽으로 불룩하게 돌출한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에서의 교전은 사실상 7월 4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투가 전개된 것은 독일군 전차부대의 첫 번째 대규모 공격이 시작된 7월 5일 새벽이었다.

7월 5일 아침 '아돌프 히틀러' 기갑사단 지휘관인 SS 대장 요제프 디트리히가 독일군 '타이거' 전차 부대에 다가가자 한 장교가 그에게 "점심은 쿠르스크에서 하겠습니다!"하고 외쳤다. 그러나 SS 기갑부대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프로호롭카 전투

7월 12일 오전 8시 30분, 소련의 타격부대가 독일 제4 기갑군 부대에 맞서 반격에 돌입했다.

독일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소련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모든 가용 병력을 투입했다. 이는 이번 소련군의 공격이 성공하면 독일 남부집단군 공격부대 전체가 완전히 궤멸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 연장 200 킬로미터가 넘는 광대한 전선에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7월 12일 하루 동안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이른바 '프로호롭카 교두보'였다. 이 지역은 하루 전인 7월 11일 벌어진 급박한 전투의 결과 독일군에 점령당했다. 독일군 제2 SS 기갑군단 주력 부대가 교두보를 장악하고 작전 중이었다. 소련군 지휘부의 집중 공격 타겟이 된 것이 이 부대다.

소련군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파벨 로트미스트로프

"몇 분 후 우리 제29군단과 제18군단의 제1제대 전차들이 그야말로 적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기습공격으로 독일 나치군 부대를 향해 정면 돌격하면서 기동 사격을 가했습니다. (중략) 독일군 공세 초기 아군의 다른 전차 부대와의 전투에서 화력적 우위를 점했던 독일군의 '타이거'와 '판터'가 이제 근접전을 벌이게 되자 우리의 T-34와 경량급 T-70에게 조차 맥을 못췄습니다. 전장은 연기와 먼지로 뒤덮였고, 강한 폭발로 땅이 뒤흔들렸습니다. 전차들이 서로 밟고 올라서서 뒤엉키고 떼어놓을 수 없는 지경이 됐고 어느 한 쪽에서 불길이 치솟거나 궤도가 파괴돼 멈춰버릴 때까지 사투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파괴된 전차들도 무기가 작동하는 한 사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소련 기갑부대 장교 예브게니 시쿠르달로프

"처음 독일 탱크를 잡은 것은 철로를 따라 숲길을 이동 중일 때였습니다. 대충 100미터 전방에 타이거 한 대가 우리 쪽에 측면을 보이고 선 채로 우리 전차들을 향해 포를 쏴대고 있는 것이 보이더군요. 우리 전차들이 타이거에 측면을 보이며 움직이고 있었고, 타이거는 우리 전차들의 측면에 발포하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우리 전차 여러 대가 벌써 그 놈에게 당한 듯 싶었어요. 나는 장갑관통탄을 조준하여 발사했지요. 타이거에 불길이 치솟았어요. 한 발을 더 쏘았더니 불길은 더 세차게 타올랐습니다. 독일군 전차병들이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상대할 겨를이 없었어요. 나는 불타는 타이거를 지나쳐 3호 전차 한 대와 판터 한 대를 더 격퇴시켰지요. 판터를 잡고 나니까 뭐랄까 어떤 희열감 같은 게 솟아 오르더군요. 굉장히 영웅적인 일을 해 냈다는 느낌 같은 거였어요."

'아돌프 히틀러' 기갑사단의 독일 전차병 빌헬름 레스

"갑자기 어디선가 T-34 한 대가 튀어나와 우리 쪽으로 곧장 돌진해 왔습니다. 나는 제1통신병이 하나씩 건네주는 포탄을 대포에 장전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는 사이 소련 탱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우리 전차장은 위에서 쉴 새 없이 "발포하라! 발포하라!"하고 소리쳤어요. 네 번째 "발포하라"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그가 "신이시여, 감사합니다!"라고 내뱉더군요.

우리는 나중에야 T-34가 겨우 전방 8미터 앞에서 멈춰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T-34의 포탑 꼭대기에는 마치 무언가에 찍힌 것처럼, 지름 5센티 크기의 구멍들이 나 있었지요. (중략) 양측의 전열이 뒤엉켰어요. 우리 전차병들은 근거리로 치고들어오는 적들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아군이 입은 피해도 컸습니다."

소련의 기갑부대, 탄약고가 가득 채워진 신형 전차들의 공격으로 교전을 거치며 기진맥진해진 적군의 기갑사단은 뿌리째 흔들렸고, 독일군은 더 이상 공격할 힘을 잃었다.

소련 제5근위전차군 본대의 프로호롭카 남서부 반격으로 독일 SS 기갑사단 '토텐코프(해골)'와 '아돌프 히틀러' 의 북동부 진격이 수포로 돌아갔다. 독일 기갑사단들은 이미 제대로 공격을 전개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프로호롭카 남부 반격에 나선 제2전차군단과 제2근위전차군단 부대들의 공격으로 독일 '라이히' 기갑사단 부대들도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피해 규모 및 결과

프로호롭프카 부근에서 맞닥뜨린 양측 전차들의 접전으로 양측이 입은 총 피해는 다음과 같다. 소련군은 전차 및 자주포 500대, 독일군은 300대를 잃었다.

물론, 독일 남부 집단군은 프호로홉카 전투가 시작되기 전 7일 간의 전투에서 이미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프로호롭카 대전투는 소련군 최대 병력이 집중 공격을 감행해 쿠르스크로 진격하려는 SS 기갑사단들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이 전투로 독일 기갑부대 최정예 사단의 사기는 땅에 곤두박질쳤고 독일군의 패배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이 기사는 일간 네자비시마야 가제타의 금요군사섹션 기사를 요약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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