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 그리고 자녀들(아래부터 시계 방향으로. 알렉세이, 마리야, 타티야나, 올가, 아나스타시야) (사진제공=Getty Images/Fotobank)
95년이 지난 지금도 황제 일가 살해에 가담한 사람의 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8명이었다는 설도 있고 희생자 수와 같은 11명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중에서 핵심 인물은 유롭스키와 메드베데프-쿠드린이었다. 두 사람 모두 나중에 총살이 있던 날 밤을 자세히 묘사한 회고록을 썼다. 두 사람 모두 역사 속에서 자신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위직에 있었고 소련 사회의 존경 받은 일원으로 여겨졌다.
야코프 유롭스키, 니콜라이 2세 황제 일가 처형 책임자. (사진제공=Press photo) |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유롭스키(1878~1938)는 1918년 당시 황제 일가가 억류된 스베르들롭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 이파티예프 하우스의 관리자였으며 황제 일가 처형부대를 직접 지휘했다. 유롭스키는 자신이 직접 니콜라이 2세를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유롭스키는 유대인이었는데 이때문에 나중에 민족주의자들이 "외래인이 우리의 아버지 황제를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황제 처형에 참가한 이들 중 '외래인'은 유대인인 유롭스키와 라트비아인 사수 첼므스 두 명뿐이었다. 게다가 후자의 가담 여부는 완전히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직업이 보석상이었던 유롭스키는 총살이 있던 밤 황가의 다이아몬드를 찾기로 마음 먹었고 결국은 찾아냈다. 시신을 살펴본 그는 공주들의 옷 속에 모두 합쳐 8킬로가 넘는 보석이 몰래 꿰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롭스키는 나중에 찾아낸 보석 전부를 모스크바 크렘린궁 관리자에게 전달했다. 초기 볼셰비키들은 꽤나 청렴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비와는 거리가 멀었다.
유롭스키는 우랄 지역 비상위원회 위원장, 고흐란(Гохран, 국가귀금속준비국) 황금 관리국장, 모스크바 과학기술박물관 관장 등을 역임했다. 이 직책들은 모두 초창기 소련 정부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고위직이었다.
유롭스키는 크렘린 전속병원에서 사망했다. 이 병원은 국가에 큰 공헌을 한 선택받은 관리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십이지장궤양 천공이 그의 사인이었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유롭스키는 고통스럽게 죽어갔다고 한다.
황제살해자들은 친분을 유지하며 집안끼리 왕래했다. 유롭스키는 황제 일가 처형에 함께 참여한 골로셰킨과 메드베데프와 찻잔을 앞에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날의 범죄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이들은 특히 그날 밤 누가 가장 먼저 총을 쐈는지를 놓고 논쟁하길 좋아했다. 어느 날 유롭스키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서방에서 출간된 책을 한 권 받았는데, 니콜라이를 죽인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라고 그 책에 명백히 쓰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미하일 메드베데프-쿠드린, 또 다른 '황제살해자' (사진제공= Press photo) |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메드베데프-쿠드린(1891~1964)도 혁명 후에 고위 관직을 차지했다. 구체적으로는 소련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 특별전권국 제1부 부장 보좌관을 지냈다. 1930년대에는 지방대학들을 돌며 황제 처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50년대 말에는 개인연금으로 4,500루블을 받았다. 모스크바국립대 법학부 학생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1918년 당시 탄약을 아껴야했기 때문에 노동자의 적들(황제 가족을 말함)의 숨통을 대검으로 끊었다고 자랑스럽게 늘어놓기도 했다.
메드베데프는 대령까지 복무했다. 죽기 전에 그는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 앞으로 황가 처형을 상세히 기록한 회고록("적대적 회오리 바람" 미출판 원고)을 남겼다. 여기서 메드페데프는 황제 일가 제거에서 유롭스키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통설을 반박하며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메드베데프는 러시아에서 가장 영예로운 묘지인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 군장(軍葬) 의식을 거쳐 안장됐다. 메드베데프는 니콜라이 2세를 사살할 때 사용한 브라우닝 권총을 유품으로 흐루쇼프에게 직접 남겼다.
메드베데프의 아들은 아버지가 사망하고 나서 니쿨린의 아들을 설득하여 라디오에 출연해 증언을 녹음하도록 했다. 니쿨린은 살해된 니콜라이 황제 일가의 시신의 사후 확인 입회인에 불과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1936년, 그러니까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유롭스키가 우리 집에 찾아와 뭔가를 쓰곤 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아버지는 그와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때론 누가 먼저 니콜라이를 쐈는지를 놓고 언쟁을 벌이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자기가 먼저 쐈다고 했고, 유롭스키는 자기가 먼저 쐈다고 하고 그런 식이었죠..."
그때 또 한 명의 황제살해자 라진스키도 자신의 회상을 녹음기에 기록했다. "한 사람이 밧줄을 들고 물 속에 들어가 시체들을 물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제일 먼저 끌려나온 건 니콜라이였습니다. 물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시체들의 뺨이 불그스레한 것이 꼭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죠... 트럭이 진흙 구덩이에 빠졌는데, 우리는 간신히 트럭을 빼냈습니다... 바로 이때 한 가지 묘안이 떠올라 실행에 옮겼지요... 여기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웅덩이를 더 넓게 팠습니다... 시체에 황산을 부었습니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망쳐 놓은 거지요... 멀지 않은 곳에 철길이 있었는데... 무덤을 감추려고 거기서 썩은 침목 몇 개를 가져왔습니다. 총살된 시체 몇 구는 웅덩이에 묻었고 나머지는 불로 태워버렸습니다... 니콜라이는 확실히 불태운 것으로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트킨(황제의 주치의)도 그렇고... 내 생각에는 알렉세이(황태자)도 태웠죠..."
1980년대 초 안드로포프 KGB(국가보안위원회, КГБ) 의장은 저녁마다 '황제살해자들'의 증언 녹음 테이프 돌려듣기를 즐겼다. 일설에 따르면 이 녹음 기록은 아직도 KGB 아카이브 안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