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한인들은 어떻게 ‘양파 밭의 제왕’이 되었나

(사진제공=리아 노보스티)

(사진제공=리아 노보스티)

1960~70년대 소련 한인 대부분은 중앙아시아에 살았다. 1930년대 연해주의 한인이 강제이주돼 정착한 곳이다.

1960~70년대 소련 한인 대부분은 중앙아시아에 살았다. 1930년대 연해주의 한인이 강제이주돼 정착한 곳이다.

하지만 한인들의 정착지인 중앙아시아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지역 벌판에서 한인 청년들과 중년의 남자들이 모여 일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이들은 그곳에 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매년 봄 계절제 농사일을 찾아 한인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것은 소련 경제 시스템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상당히 독특한 형태의 임차농업 방식이었다.

'고본지' 또는 '고본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임차농업 방식 덕분에 소련 한인들은 짭잘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동시에 소련의 국가주도 농업이 내포한 총체적인 비효율성을 개선하는 효과도 낳았다. ('고본'이란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하는 사업에 각자 내놓는 밑천을 뜻한다. '질'은 어떤 행위를 뜻하는 한국어 접미사다. - Russia포커스 편집부).

소련에서 토지는 모두 국가 소유였다. 농업 경영도 국가가 임명한 농업 관료들의 손에 맡겨졌다. 그래서 농부들이 열심히 일해야 할 동기가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도 농부 개인의 작업량이 개인 수입에 직접 반영되지 않은 탓이다. 그뿐 아니라 농장 경영자들은 국가 지정 할당량을 채워야 했는데, 만약 채우지 못하면 곤란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계절제 농사 작업조는 구원의 손길로 다가왔다. 한인들은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로 작업조를 만들어 해마다 봄이 오면 좋은 돈벌이를 찾아 소련 서부의 여러 농촌 지역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계약이 성사되면 더 많은 수의 한인 작업조가 도착했다.

'고본지'라는 독특한 임차농업 방식은 다음과 같이 작동했다. 고본지 작업조는 농장으로부터 원하는 만큼 사용할 수 있는 땅을 임차해 농사를 짓는다. 한해 추수가 끝나면 한인들은 계약된 양의 농산물을 농장에 떼어주는데, 그 양은 국가가 지정한 할당량을 조금 웃도는 규모였다.

농장 관리자들은 감독기관에 국가가 농장에 할당한 생산계획을 달성했다고 보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본지 작업조는 자신들이 초과로 생산한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팔아 사적인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채소와 과일 재배와 같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생업을 이어간 것이다(양파와 수박 농사가 제일 인기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고본지라는 임차농업 방식 자체는 소련 시스템 하에서 불법이었다. 그래서 농장 관리들에게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개는 순조롭게 일이 진행됐다. 농장 책임자에게나, 한인들에게나 이런 작업 방식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한인들은 고본지 방식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국영농장의 농부들과는 달리 고본지 방식으로 일하는 한인들의 수입은 그들이 열심히 일한 만큼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인' 농지의 생산량은 국가 계획량 보다 2~3배 더 많은 것이 일반적이었다(아주 예외적인 경우, 한 작업조가 계획량을 700~800% 달성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성공한 고본지 노동자는 당시 소련 기준으로 볼 때 정말로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숙련된 전문직 종사자일지라도 그가 만일 한인으로 태어났다면 들판에 나가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일만 열심히 한다면 한 여름 동안 5천 루블을 너끈히 벌 수 있었으니 말이다(5천 루블은 대학 교수의 1년 연봉에 맞먹는 액수였다).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이런 방식은 한인들의 전유물로 남았다. 어떤 의미에서 구소련에서 한인들은 반(半) 민간 농업을 대규모로 종사하도록 허용된 유일한 민족 또는 사회 그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본지 방식은 1990년대 초 민간 농업의 부활로 생산성이 증대되자 거의 사라졌으며, 한인들은 새로운 경제 체제 안에서 '등골 빠지는' 밭일 대신에 더 수월하게 돈을 버는 법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양파밭에서의 고된 노동과 그 뒤에 따르는 짭잘한 돈은 구소련에 사는 많은 한인 가족의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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