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미국의 식민지화와 같은 점과 다른 점

시베리아 숲

시베리아 숲

안나 그루지데바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평화적으로 새로운 땅을 얻었을까 폭력으로 정복했을까?

시베리아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러시아 영토로 편입됐다. 1585년 러시아 최초의 탐험대가 우랄 산맥 너머에서 사망했지만 그로부터 54년 뒤 러시아인들은 태평양 연안까지 도달했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러한 속도는 시베리아 땅의 평화로운 편입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로 다른 연구자들은 이 과정에서 침략이 있었고 현지인들의 이익이 묵살됐다고 본다.

러시아-시베리아 관계사

러시아인들과 시베리아 토착민들의 접촉은 우랄 군사 원정이 있기 훨씬 전에 이뤄지기 시작됐다. 14세기 라브렌티예프 연대기에는 11세기 노브고로드인인 귤라타 로고비치가 언급되어 있다. 그는 우랄 산맥 북부와 북빙양 사이에 걸쳐 있는 ‘유그라 땅’으로 탐험을 떠났다. 역사학자 솔로비요프에 따르면, 연대기에 언급되어 있는 ‘큰 산들과 구리 문’은 우랄 산맥을 가리킨다. 이후 노브고로드 우시쿠이니크족(강들을 누비며 약탈을 일삼은 사람들)은 이 지역을 여러 차례 습격하곤 했다. 1483년에는 모스크바의 전사들이 우랄로 군사 원정을 떠났다. 1555년 시베리아한국(汗國)(몽골제국의 작은 부속국)은 러시아 왕국의 속국이 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칭기스칸의 후예인 쿠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속국에서 벗어나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사진 제공: Press photo사진 제공: Press photo

최초의 완전한 식민지 탐험대는 1581년 카자크 예르마크의 쿠춤 정벌대였다. 그 즈음 쿠춤은 러시아 국경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쿠춤의 권력이 불안정한 가운데 이슬람교 지배자보다는 러시아 황제를 더 선호한 시베리아 민족이 많았다. 카자크인 800명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특히 한티-만시 민족이 쿠춤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고 바로 전장에서 달아난 덕분에 쿠춤의 군대 1만5천 명을 물리쳤다. 이후 수십 년간 쿠춤은 유격전을 벌이고 대담한 습격으로 심지어 예르마크조차 살해하지만, 시베리아의 식민화를 멈추지는 못했다. 새로운 탐험대들이 시베리아에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이 정착지들은 훗날 큰 도시로 발전한다. 1586년에는 튜멘(현재 인구 71만 명), 1604년에는 톰스크(현재 인구 57만 명), 1628년에는 크라스노야르스크(현재 인구 1백만 명 이상)가 건설됐다.

시베리아는 식민지가 아니다

‘거대 지역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감성적인 팜플렛 내용을 제외한다면 북미 지역과 달리 시베리아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러시아에서는 ‘식민 통치’와 ‘본국 통치’ 구분이 없었다. 따라서 시베리아는 그냥 러시아 왕국에 포함됐다. 이와 함께 현지 엘리트들도 러시아로 통합됐다. 그들을 말살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러시아에 맞서 싸운 쿠춤의 아들은 결국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쿠춤의 손자는 속국인 카심 한국의 수장이 되었다.

전문가들의 추산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이 진출하기 전 시베리아에는 24~30만 명이 살고 있었다. 그것도 1300만㎢라는 넓은 땅에서 살고 있었다.(일본의 면적은 38만㎢이지만 1억2600만 명이 산다)여기엔 러시아에 집중적으로 저항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튜멘인들은 자기들까지 싸웠고, 다른 민족들은 ‘황제의 손길’을 분쟁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카자크들이 동쪽으로 가면 갈수록, 독립을 유지하려는 사람들과의 충돌이 빚어져 그만큼 더 많은 피를 흘렸다.

자유를 사랑하는 민족들의 땅에서 새로운 권력은 요새와 기지에 의존했지만, 현지인들의 저항은 여전했다. 이들은 습격을 하고 불을 질렀는데, 카자크들도 그와 똑같이 대응했다. 민속학자인 게오르기 에르기스는 “야쿠트족 전설에 러시아인의 이미지가 ‘싸우고 학살하는 사람들’로 묘사돼 있다”고 말했다.

불굴의 축치족

가장 끝까지 저항한 민족이 축치족이었다. 이들은 카자크들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고 이따금씩 카자크들을 무찌르기도 했다. 하지만 전투 규모는 크지 않았다. 오를로바야 강에서 러시아 군대가 대패했을 때 죽은 카자크들은 51명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러시아 차르 권력이 축치족에게 보인 반응은 아메리카 정복자들의 행동과 사실상 다를 바 없었다. 1742년 러시아인들은 ‘굴하지 않는 축치인들을 무기로 공격하여 완전히 전멸시키라’는 황제의 칙령을 따랐다.

예르마크의 정벌. 사진 제공: Wikipedia예르마크의 정벌. 사진 제공: Wikipedia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시베리아 토착민들도 전염병에 취약했다. 역사학 교수인 존 리차즈는 “새로운 질병들이 토착민 인구를 줄이고 정신을 황폐시켰다. 천연두는 퉁구스족 80% 이상과 유카기르족 44%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러시아는 시베리아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외교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만 무력에 의존했다. 현재 러시아 연방에는 부랴트인 46만 명과 야쿠트인 48만 명(시베리아 정복 시절 이들의 수는 30만 명을 넘지 않았다)이 살고 있다. 일부 민족은 민족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야쿠티야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인보다는 야쿠트인이 더 많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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