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네브레프의 "싼흥정"
트레티야코프 미술관‘러시아사 강좌(Курс российской истории)’의 저자 바실리 클류쳅스키는 18세기 말 러시아 농민계급의 상황을 두고 ‘러시아 농촌마을은 톰 아저씨 시대 북미의 흑인 대농장으로 변했다’고 썼다. 그때까지 러시아에는 농노제가 번성했다. 농민은 지주의 토지에 법적으로 ‘부속돼 있었으며’, 지주가 전적으로 농민의 운명을 결정했다.
농노제란 가장 완전하고 가혹하게 농민을 종속시키는 형태를 확고히 한 봉건국가의 법적 규범의 총체다. 여기에는 농민의 토지 이탈 금지(소위 농민의 토지 고착 또는 농민의 토지예속이다. 탈주 농민은 강제로 귀환됐다), 특정 봉건영주의 관리권 및 사법권에 따른 세습적 종속(농노의 자식도 자동적으로 농노가 됐다), 농민의 토지 처분권 및 부동산 취득권 박탈이 포함됐으며, 때로 봉건영주가 토지를 빼고 농민을 처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17세기의 크렘링군. 출처: 아폴리나리 바스네초프/ 모스크바 역사 박물관
전제 군주제 러시아에서 농노제는 16세기 경 광범위하게 퍼졌다. 1649년 ‘의회법전(Соборное уложение)’에서 공식 확인되며 1861년 폐지됐다.
러시아의 농노제는 16세기 말~17세기 전반에 형성됐다. 이전에는 지주를 위해 일하는 농민은 특별히 미리 정한 날에 자기 의사에 따라 다른 주인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1649년 러시아 왕국 최초의 법령 모음집인 의회법전은 농민의 이동을 완전히 금지했다.
러시아 국민경제국가행정아카데미 사회학 연구소 수석연구원인 역사학자 알렉산드르 피지코프는 “국가는 농민을 토지에 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농민들은 가능했을 때 영주와 국가로부터 더 멀리, 벽지로 자주 도망갔다.
16~17세기에 러시아는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을 했기 때문에 병사로 모을 수 있는 농민들이 필요했다. 피지코프는 “그것은 지주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농민들은 바로 지주를 위해서 일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결과 17세기 경 농민의 예속화는 러시아의 모든 영향력 있는 세력들을 만족시켰다.
1869년, 연공 모으기. 출처: 알렉산더 크라스노셀스키/ 볼스키 시의 박물관
농노는 지주가 내 준 땅에서 살고 일했으며 그 대가로 ‘부역 노동’을 제공하거나 ‘소작료’를 냈다. ‘부역 노동’이란 농민이 1주일에 며칠은 지주 땅을 갈거나 감자를 캐는 것을 의미한다. ‘소작료’는 농민이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하지만, 정해진 시기에 수확물의 일부 또는 돈을 지주에게 지불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18세기에도 농노제는 유지되고 강화됐다. 표트르 1세(1682년~1725년 통치) 때는 농노를 매매하거나 증여하는 관행이 널리 퍼졌다. 황제 자신도 알렉산드르 멘시코프 공작에게 탈주 농노 약 10만 명을 선물했다. 예카테리나 2세(1762년~1796년 통치) 시기 귀족들은 자기 농노를 유형을 보내 징벌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출처: 리아노보스티
러시아의 모든 농민이 농노였던 것은 아니다. 농민 일부는 지주가 아니라 국가 또는 황궁을 위해 일했다. 일부 지역 예를 들어 시베리아 및 북부에는 농노제가 아예 없었고 농민들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18세기 말 무렵에는 결국 농노가 매우 많아졌다. 인구조사(과세에 관한 문서)에 따르면 농노의 수는 인구의 50%를 초과했는데 당시 총 인구는 4000만 명이었다.
농노의 삶은 주인을 얼마나 잘 만나느냐에 달려 있었다. 사디스트 여지주 다리야 살티코바의 이야기는 슬픈 내용을 전한다. 그녀는 38명 이상의 농노를 죽도록 고문했다(공식적으로 귀족에게는 농노를 죽일 권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762년 살티코바는 투옥됐다. 그러나 그녀만 농노를 때리고 업신여긴 것은 아니다. 지주 앞에 농노는 거의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 알렉산드르 피지코프는 러시아 농노를 북아메리카의 노예와 비교한 클류쳅스키의 견해는 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물론 농노의 삶은 어려웠다”며 “그러나 농노들은 그렇게까지 물건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그들에겐 삶의 터전이자 항상 자신을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일을 할 수 있는 토지가 있었다”고 했다. 일부 지주들은 농노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고 교육을 받게 해 줬으며 자유민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러시아 농민. 출처: 니콜라이 야로센코
파벨 1세는 1797년 ‘3일 부역노동에 관한 칙령’에 서명함으로써 농노의 숙명에 드리워진 짐을 덜어주려는 최초의 시도를 했다. 황제는 지주들이 일요일에 농노에게 일을 못 시키게 했으며 나머지 요일을 똑같이 나눠 3일은 지주를 위해, 3일은 농노 자신을 위해 일하도록 했다.
피지코프에 따르면, 파벨 1세의 칙령은 우선 황제가 농노에 대한 지주의 권력을 제한하려 노력하고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칙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어겨도 처벌한다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어지는 러시아 황제들의 시도들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알렉산드르 1세의 ‘자유 경작자에 관한 명령’(1803)은 지주들에게 농노를 해방시킬 수 있는 권리를 제공했으나 지주들은 이를 ‘서둘러 누리지는’ 않았다. 전체 농노 가운데 1.5%만 명령의 유효기간 동안 자유를 얻었다.
‘경기병 여단의 전투’. 출처: 리처드 케이튼 우드빌 2세
역사학자 알렉산드르 피지코프에 따르면 다른 유럽 강대국들과 달리 러시아는 1861년까지 농노제를 가장 오래 유지했다. 그는 “러시아 황제들은 귀족 엘리트들에게 의존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들 엘리트 대부분은 농노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기존 질서를 바꾸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귀족들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던 정부는 그들의 특권이 침해되는 것을 우려했다.
1853년~1856년 크림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놨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대영제국과 프랑스에 패했다. 역사학자 알렉산드르 오를로프에 따르면 패배 원인 중 하나는 경제와 연관돼 있었다. 농업 및 반(半)봉건적 경제형태가 유지됐던 러시아의 산업은 산업혁명을 거친 유럽 국가들보다 뒤처졌던 것이다.
개혁의 필요성이 분명해졌고, 민중의 불만도 명백했다. 1855년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가 스스로 아래로부터 없어지기를 기다리기보다 위에서부터 폐지하는 것이 낫다”고 선언했다.
농노들이 자유를 받는다. 출처: 쿠스토디예프
긴 준비작업을 거친 후 개혁이 완수됐다. 1861년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제 폐지에 관한 칙령’에 서명했다. 러시아 제국 인구의 34%나 됐던 2300만 농노가 자유민이 됐다.
그러나 여전히 농민들은 종속된 상태로 남았다. 그들이 의지해 살았던 토지는 여전히 지주들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토지를 사들이거나 토지를 포기하고 도시로 일하러 가야 했다.
개혁은 농노들의 집단적인 불만을 불러 일으켰고, 개혁이 채택된 직후 전국에서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은 황제가 농노를 ‘정말로’ 토지와 함께 해방시켰으나 악한 지주들이 민중에게 진실을 숨겼다고 확신했다. 농민들은 45년 더 민중의 반란들과 1905년 혁명 이후 정부가 토지대를 폐지한 1906년까지 토지를 사들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