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키릴 칼린니코프/리아 노보스티, 러이터)
클럽의 입구 근처에 추위로 몸을 잔뜩 웅크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다. 운전자들이 보행자들을 위해 남겨둔 조그만 땅은 비싼 모피외투를 입은 아가씨들과 그녀들의 동행자들, 그리고 건장해 보이는 남성들에게 점령당했다. 출입문 근처에는 글러브를 낀 험상궂은 표정의 남자가 체스판과 함께 있는 모습이 인쇄된 포스터가 걸려있다. '체스복싱 세계선수권 대회'라는 타이틀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정말 흥미진진해요!" 이렇게 말하는 곱슬머리의 여성은 아마 모스크바에서 다양한 오락거리를 체험했겠지만, 체스복싱이란 어쨌든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다. "복싱과 체스를 어떻게 매치할 수 있는지 상상도 못하겠어요. 복싱선수들은 뇌가 다 손상되어버렸을 것 같거든요."
체스복싱이 세상에 등장한 지 10년이 됐지만 아직은 생소하고 이국적인 스포츠로 여겨진다. 체스와 복싱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두 스포츠를 합쳐보자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은 네덜란드의 행동파 예술가인 이페 루빙이다. 2003년부터 아마추어 체스복싱 선수들은 정기적으로 서로 머리에 주먹을 날리고 휴식시간 동안 머리를 제 정신으로 만든 후 머리 회전을 시작하는 경기를 해오고 있다. 체스복싱은 11라운드로 구성된다. 이 중 6라운드는 체스경기이고 5라운드는 복싱경기다. 한 라운드는 3분 간 진행된다. 이때 두 선수는 경기 내내 체스 한 판을 이어서 둔다. 머리 회전이 빨라야 한다. 매 초가 카운트되는 래피드 체스이기 때문이다. 선수가 오랫동안 말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면 심판의 경고가 날아와 망설이지 말라고 재촉한다.
상황이 수시로 바뀌는 것도 체스복싱의 매력이다. 치열한 복싱 라운드를 마친 선수들의 바람은 단 한가지, 숨을 고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때때로 체스판의 말들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시계의 버튼은 고장나 버리기 일쑤다. 선수들이 제대로 체스를 두도록 돕는 것도 심판이다. 실제 그랜드마스터(최고 수준의 체스 선수)들에게는 이런 경우가 물론 달갑지 않겠지만 지켜보는 사람들로서는 매우 재미나는 일이다.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공간감각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선수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동시에 똑똑한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페 루빙은 자신이 발명한 이 종목에서 최초의 세계챔피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최신 유행의 검정색 양복에 가는 넥타이를 맨 수염이 덥수룩한 남성이다. 루빙은 그의 프로젝트를 추진함에 있어 러시아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다고 몇 번이나 말한다. "복싱과 체스는 러시아인의 피 속에 흐르고 있죠"라며 그는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러시아는 체스와 복싱 모두에서 수많은 챔피언들을 배출했으니까요."
그러나 러시아인이 머리쓰기도 좋아하고 싸움도 좋아한다는 것만이 핵심은 아닐 것이다. 모든 신생종목이 그렇듯 체스복싱에도 스폰서가 필요하다. 현재 선수들이 받는 대전료는 푼돈이나 마찬가지다. 3,000달러 이하의 상금에 교통비가 전부다. 모스크바 대회는 체스복싱이 프로스포츠로 편입되는 중간단계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표 값이 1,500~18,000 루블(약 5만~60만 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페 루빙이 관중석에서 투자자들을 찾을 기회는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 체스복싱계의 최고 선수는 슈퍼헤비급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가진 시베리아에서 온 체중 100kg의 거구 니콜라이 사진이다. 그의 본업은 부동산중개업자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출신인 사진은 어렸을 때부터 체스가 취미였고 14세부터 샌드백을 치기 시작했다. 그는 체스와 복싱의 하이브리드 종목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국제체스복싱연맹(WCBO)에 당시 세계챔피언이었던 프랑크 슈톨트(당시 37세)의 도전자 후보 자격을 심의해 달라는 요청이 담아 신청서를 냈고, 2008년 여름 처음으로 챔피언이 됐다.
모스크바 선수권대회에서 니콜라이 사진과 맞붙는 선수는 이탈리아에서 온 지안루카 시르치(41세)로 그의 외모는 이탈리아 마피아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물학박사로 상당히 온순한 사람이다. 경기를 마친 후 니콜라이 사진은 처음부터 체스에 집중하기로 결심했고 복싱 라운드에서 상대방을 제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관중들은 그의 전술을 금세 알아차렸다. 니콜라이 사진이 체스말을 움직이는 차례에 관중석에서는 "항복해! 항복해!"라는 고함으로 지안루카 시르치를 압박한다. 시르치가 9라운드에서야 항복하자,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시를 노래로 만든 '여기서 다시 마시고, 싸우고, 눈물을 흘린다'가 두 번째로 링 위에 울려 퍼졌다. 바로 니콜라이 사진이 경기장에 등장할 때 나온 노래다.
힘과 지성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한 니콜라이 사진에 악수를 청하려 거의 모든 관객이 몰려든다. 그래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여자친구는 한 쪽에 얌전히 서 있어야 했다. 이 순간에 드는 생각은, 링 위의 니콜라이 사진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복싱과 체스를 서로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 TV에서 블라디미르 클리치코를 보고는 아마 그가 체스판 앞에 앉아있는 모습은 어떨지를 상상하게 될 것이다.